한길다반사2009.07.31 11:07


늦은 밤, 잠들지 않은 한 남자가 있다. 집에는 문패가 없다.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전화를 거는 친구가 있다. 그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 걸기 보다 장거리 전화를 하는 쪽을 택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아련한 목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화로 한두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전화를 하지도, 라디오를 듣지도 않는 밤이면 차를 달려 어디론가 향한다. 자정이 넘은 시각. 그가 닿은 곳은 국도변에 있는
이름이 없는 카페다.


남자는 그 앞에 차를 세운다. 헤드라이트가 꺼진다. 이윽고 유리로 된 카페 안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한 쌍의 연인이 바 앞에 앉아있다. 여자는 붉은 색 원피스에 금발이고, 남자는 어두운 빛깔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있다.
흰색 세일러 복을 입은 까페의 주인은 손님과 가벼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몸을 조금 숙인채 바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다. 사방이 캄캄한 밤. 불빛을 내는 건 오직 그 곳뿐이다. 창 밖의 남자는 안쪽을 잠시 바라본다.
남자의 이름은 글렌 굴드이고, 피아니스트다.


이제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건장한 까페 주인은 이 왜소한 남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밤의 카페에서 그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호퍼『나이트호크』 1942, 캔버스에 유채 


늦은 밤, 혼자 차를 달려 국도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글렌 굴드의 습관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호퍼의 그림, "Nighthawks"(밤샘하는 사람들) 어딘가에 그가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호퍼가 “Nighthawks”를 그린 것은 1942년이고, 그 때 굴드는 열 살 남짓 된 소년이었을 것이다.)
그는 눈부신 실내등 밑을 성큼성큼 걸어 연인의 뒤를 지나친다. 잠시 침묵했던 카페의 세 사람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굴드는 한 쪽 바에 자리를 잡고 그들 모두와 조금 떨어져 앉을 것이다.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조차 등을 보인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글렌 굴드는 철저히 고립된 사람이었다.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차를 한참 달리면 나오는 한적한 바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세 사람과 대화를 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면서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그가 좋아하던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였고, 다른 두 사람 역시 지나간 시간을 산 사람들이었다. (독일인 음악 이론가이거나, 브롱크스의 택시 운전사 였던 때도 있다.)
그는 평생 혼자 살아갔다고 했다. 그에게 외로움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 있어 영원한 것은 오직 음악이었다. 밤이면 히터를 잔뜩 튼 차를 달려 혼자 알래스카로 가곤 했다. 그에겐 녹음실이 있었지만 정해진 집이 없었다. 알래스카 어딘가의 호텔에서 자는 하룻밤, 그것이 그의 집이었다.
이것은 내가 알던 전형적인 예술가의 삶과는 무척 대비되는 것이었다. 예컨대,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두 번쯤 하고 타히티 같은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그런 삶. 


그래서인지 굴드의 음악에서는 무성(無性)의 느낌이 묻어난다. 그건 그가 삶에서 추구했던 진실과 꼭 닮은 모습이다. 한편, 호퍼의 그림을 보면 시간이 공간 안에 들어와 멈춰있다는 느낌이 든다. 쓸쓸하지만, 처연하지는 않다.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를 내 곁으로 끌어들이려는 감정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독 안에서 기꺼이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자기에게 조차 거리를 두고 지나가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다.

나는 사랑이 내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사랑하는 대상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에도 그 사랑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 것을 경험한다.
외로움 혹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을 쫓는다 해도 사실, 그것은 철저히 여기에 머문다. 카슨 매컬러스가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에서 묘사한 부분이 떠오른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상대가 결국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를 쓴 미셸 슈나이더가 글렌 굴드에 대해 쓰면서 절로 ‘Nighthawks'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점, ‘빈방의 빛’을 쓴 마크 스트랜드가 글렌 굴드와 같은 캐나다 사람이었다는 지점이 겹쳐졌던 것이 흥미로웠다.)
  
 

- 편집부 장혜령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카슨 매컬러스, 문학세계사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미셸 슈나이더, 동문선
『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한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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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