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다섯 번째 이야기
인간들의 운명, 인간들의 역사
중국인과 한국인, 한국인과 중국인

 


                                                                                                                                                                                                                       이용석(성바오로병원 근무)

 

 

  지금 중국에는 한국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환자가 한국에서 걸러지지 못하고 홍콩을 경유하여 중국에서 격리조치 받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이를 보고 ‘까오리빵즈’(高麗棒子, 몽둥이찜질해도 시원찮을 고려얼간이들이란 뜻으로 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말)라고 하며 반(反)한류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한국 SNS 및 포털에서 실시간 검색어 최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이런 반한(反韓) 상황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한국의 무능한 검역시스템은 나중에 논하는 것으로 하고 만약 오늘날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숨쉬고 생활하는 터전인 신중국 건설에 우리 선조들이 크게 일조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렇게 극한 감정으로 한국을 비난할 수 있을까? 요즘 젊은 한국인들도 잘 모르고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한ㆍ중 공조의 중국현대사를 안다면 이렇게까지 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뿌리는 같다. 양당의 대결은 황푸군관학교 출신들끼리의 싸움이었다."

 <중국인 이야기 4> , 91쪽

 

중국과 한국, 그 오랜 역사적 인연
  20세기 중국 현대사는 황푸군관학교(육군군관학교가 정식명이지만 지역이름을 본떠 황푸군관학교라고 불렀다) 출신들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장을 지낸 장제스(국민당, 전 타이완 총통)와 정치부 주임 저우언라이(중공 총리)를 비롯해 쉬샹첸(중공 국방부장), 예젠잉(중공 육군원수), 천겅(6.25전쟁 참전군 부사령관 역임), 다이리(국민당 조사통계국장, 장제스의 오른팔), 후쭝난(국민당 총참모장) 등 중국과 대만을 움직인 거물들이 이곳에서 같이 생활하며 이념은 달랐지만 조국의 개혁과 해방을 꿈꾸며 같은 꿈을 키웠다. 그리고 거기에 조선 사람들이 있었다.

 

 

황푸군관학교

 

 


대한민국독립을 위해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가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황푸군관학교가 개교하자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총리 신규식은 쑨원(황푸군관학교 설립자 및 신중국의 국부)을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조선인 학생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줄 것을 협의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도 조선인의 입학을 요청해 조선 학생 73명이 입교한다.
이때 입학했던 조선인 학생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양림, 이범석, 최용건 등이 있다. 양림은 윈난 쿤밍에 있는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황푸군관학교의 교관을 지냈다. 이후 1932년에 만주의용군을 조직했으며 홍군 23군 군단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이범석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전투를 치른 후 만주를 떠나 윈난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이후 후쭝난의 지도하에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해방 후 귀국해 대한민국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최용건은 윈난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1928년 만주 헤이룽장 성 통화 현에서 반일폭동을 일으킨다. 이후에 김일성처럼 동북항일연군에서 7군 참모장을 지내고 해방 후 귀국해 북한에서 국가 부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그 외에도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본명 장지락), 김성숙(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 장건상(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원 등의 조선인들이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부는 1927년 7월 중국인 예팅, 허룽, 예젠잉 등 훗날 중공의 주축들과 연합해 난창기의를 일으키고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해방을 꿈꾸며 중국의 항일전쟁과 신중국건설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맹활약한 인물도 부지기수였다. 더불어 조선인 교관 밑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의 많은 엘리트가 지금의 신중국을 건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너무나 닮아 있는 두 제국의 몰락
  특히 <중국인 이야기 4>의 ‘무너지는 제국’(193쪽)을 읽는 내내 청말 황실의 몰락과 대한제국 황실의 몰락이 머릿속에서 계속 교차되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아이신줴뤄 푸이는 군벌에 의해 자금성에서 쫓겨나고 일제에 의해 만주국 황제로 취임하여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하다가 1945년 일제의 패망 및 1949년 신중국 건설이 이루어지면서 전범자로 수감생활을 한다. 풀려난 후에는 문화대혁명 시기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생을 마감한다. 나는 문득 대한제국의 영친왕이 떠올랐다. 황실의 몰락과 함께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었고 일제의 정책에 의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 육군에 임관하여 전장을 돌아다니다 조선 사람이 아닌 일본인 여인 마사코(한국명 이방자 여사, 대한제국 영친왕비)와 정략결혼을 한다. 1945년 광복 후 영친왕을 견제한 이승만의 방해로 그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1963년 혼수상태로 영구 귀국하여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한다.
  푸이의 효각민황후 완룽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말년에 아편에 취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1935년 만주국 시절 완룽은 일본군관 사이에서 사생아를 출생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푸이는 황후가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 버렸고, 완룽은 출산한 아이를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고 양육비를 건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를 보니 나는 또 대한제국의 황녀 덕혜옹주가 떠올랐다. 경성일출심상소학교에 재학 중에 일본의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여자학습원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에 옛 대마도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여 1932년에 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1930년에 조울증, 우울증과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증 증세를 보였으며 결혼 이후에는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 이혼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 거주하다 1989년 사망하였다. 딸 소 마사에는 어머니와의 불화로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두 제국의 중심인물들의 최후가 어쩌면 이리도 비슷할까? 묘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왜 그럴까? 나는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묘하게도 중국인 인물들에 한국인 인물들이 오버랩된다. 한 인간의 운명은 또 다른 인간의 운명일 수 있을까? 인간들의 유형은 비슷한 듯 다른 것일까?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인물과 사건을 통해 보는 중국사이면서 보편적 인간 극장 같기만 하다. 다음 편에는 또 어떤 인물들이 나올까? 5권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용석(성바오로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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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네 번째 이야기
<중국인이야기>와 나의 중국문화여행
<중국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넘어갈수록
그들이 밟고 있던 역사 속으로 물밀듯이 나아가고 싶어진다
 
                                                최종명 (문화평론가, 중국여행전문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중국인 이야기> 1, 2, 3권만큼이나 4권을 읽으면 중국 방방곡곡을 땀내 닦으며 걷던 기억들로 설렌다. 장쉐량의 고향 선양의 장솨이푸와 ‘시안사변’의 총탄 자국, 그의 첫 연금 현장이자 장제스의 고향 시커우의 미륵보살 성지, 대장정의 종착지 옌안의 동굴 집 야오둥, 베이징 후퉁에 있는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의 고거, 마지막 황제 푸이의 창춘 위만황궁박물관, 동북항일연군의 만주 벌판까지 중국사의 주요 장면이 옴니버스로 엮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책 속에 담긴 ‘중국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넘어갈수록 그들이 밟고 있던 역사 속으로 물밀 듯이 나아가고 싶어진다. 나의 중국문화답사기의 단골 메뉴이기도 한 장쉐량과 푸이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이니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쉐더우산 연금 장소에 있는 장쉐량과 자오이디 조각상.


폭포 같은 사랑, 쑹메이링과 장쉐량
쑹메이링과 장쉐량의 인연은 제1부 ‘풀리지 않는 삼각관계’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들의 정분이 ‘만리장성’을 쌓을 정도로 깊었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시안사변 이후 53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시안사변 한 달 후 황푸군관학교 출신 국민당 특무 다이리의 호송을 따라 ‘제일유금지’(第一幽禁地) 쉐더우산에 온 장쉐량은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낙차 171m의 천장암 폭포를 즐겨 찾았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장쉐량에게 감정이입을 하노라면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권력핵심의 정치인이 토해냈을 사자후가 들리는 듯도 하다.
 
쉐더우산에는 늠름한 청년 장군 장쉐량 조각상과 함께 연금생활 도중 단 3일도 곁을 떠난 일 없던 자오이디 여사의 백옥 같은 조각상도 자리를 잡고 있다. 1960년대 쑹메이링은 해금을 도울 목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한다. 처와 첩을 둔 장쉐량은 일부일처 제도와 해금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미국에 있는 본처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본처 위펑즈는 장쉐량과 자오이디의 “순수한 사랑을 믿으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이혼에 동의한다. 장쉐량은 기독교에 귀의했지만, 장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아들이자 총통이 된 장징궈에게 ‘절대 불가’를 유언하기도 했다. 72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결같았던 자오이디는 2000년, 장쉐량은 103세의 나이로 2001년 나란히 숨을 거두고 합장됐다. 장쉐량을 평생 살펴준 쑹메이링도 2003년 천수를 누리고 그들 곁으로 떠났다.

 

 

 

위만황궁박물관에서 본 황제 즉위 시절과 수감 후 재판 장면.

 


무너지는 제국, 비운의 황제 푸이
장쉐량만큼 삶의 우여곡절이 깊던 인물은 마지막 황제 푸이다. 제3부 ‘무너지는 제국’에서 푸이는 수감 중에 자신의 네 번째 부인 리위친에 의해 이혼당하는 황제라는 오명을 얻는다. 진시황 이래 어느 황제에게도 이혼이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푸이는 여전히 황제 대우를 받던 시기에도 이혼당한 전례가 있다. 황후와 황비를 동시에 얻어 결혼한 푸이는 퇴위 후 1931년 8월 ‘마지막 황비’ 원슈로부터 이혼선언을 당한다. 이를 역사에서 ‘도비혁명’(刀妃革命)이라 부르는데 황제 푸이의 엄청난 충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혼에 이르게 된 까닭을 황후 완룽의 시기와 질투 때문으로 여긴 푸이는 크게 상심했다. 완룽은 허울뿐인 황후로 전락했고 우울증에 시달려 아편에 집착했으며 시위와의 불륜으로 임신까지 했으니 황실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푸이는 만주족 출신의 탄위링과 결혼해 그녀의 사진 뒷면에 ‘내가 가장 사랑한 탄위링’이라 손수 쓸 정도로 다정했지만 5년 만에 의문의 병사를 했다. 그리고 책에서 자세히 언급한 리위친과 결혼하게 되지만 1957년에 다시 이혼 소송으로 둘 사이의 관계도 끝나고 만다.
 
창춘의 위만황궁박물관에는 '황제에서 평민까지'라는 푸이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 있다. 그의 일생은 화려했지만 불우했고, 처량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말년을 보냈다. 체포 후 곧 죽을 목숨이라 생각했던 그는 15년의 수감 생활 동안 수많은 반성과 신중국 지지 선언을 거쳐 감옥으로부터 풀려난 후 마지막 부인 리수셴과 결혼한다.
 
둘 사이는 아주 금슬이 좋았지만, 푸이는 문화혁명 초기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1967년에 결국 신장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사망 후 유해는 베이징 인근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됐다가 1995년 청나라 서쪽 황릉 부근 사설 묘원인 화룽능원에 이장된다. 3살에 황제가 되었지만, 자금성에서 쫓겨난 황제라는 숙명 때문에 청나라 황실 능원인 동릉과 서릉 어디에도 안치되지 못했다.

마지막 황릉은 선통제 푸이가 아닌 광서제의 몫이었다. 청나라는 재정문제로 갈수록 황릉의 규모가 축소됐는데도 광서제의 숭릉은 화려하고 거대하다. 숭릉에 서면 푸이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숭릉 뒤쪽 200m 지점에 잠들어 있는 푸이야말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20세기 <중국인 이야기>의 한 장면이니 말이다.
 
천일야화보다 더 긴 차이니즈 나이트를 기다린다
김명호 저자의 <중국인이야기>를 4권까지 읽으면서 늘 ‘중국문화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중국판 ‘아라비안나이트’를 밤을 새워 읽어야 하듯 우리는 ‘중국’을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살피듯 정치와 경제도 제대로 파악해야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나라와 선의의 경쟁과 우호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신드바드’가 모험을 떠났음직한 파키스탄의 항구 과다르는 중국이 40년 운영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신실크로드로 질주하는 중국을 이해하는 코드로 <중국인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천일야화보다 더 기나긴 ‘차이니즈 나이트’가 또 기다려진다.

 

 

 최종명

문화평론가, 중국여행전문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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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세 번째 이야기

혁명가의 요람 황푸군관학교와 서북왕 후쭝난
“혁명은 청년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키가 혁명과 무슨 상관이냐.”
 
                                                                                          

          최창근(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저자)

                                                                                                    


 

 

 

 

청년 시절의 후쭝난. 1927년 봄 항저우.

 

 

대한광복군에 도움 준 후쭝난
지난 5월 28일, 네 번째를 맞이하는 ‘차이니즈나이트’에서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사변, 혁명가의 요람 황푸군관학교,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와 주변 인물들, 북ㆍ중 관계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였다. 그중 내가 가장 관심 있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황푸군관학교를 둘러싼 이야기와 <중국인 이야기 4>의 제2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선생님이 “사관학교의 경우, 후배는 있어도 선배는 없는 1기생 중에 걸물이 많다. 황푸군관학교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표현했듯 1기의 걸물 등 중 ‘서북왕 후쭝난’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

후쭝난은 내 오랜 관심분야인 한ㆍ중 관계, 한국-타이완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잃고 중국 대륙을 정처 없이 방황하던 시절,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이후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였다. 윤봉길의 의거에 큰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을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대한광복군 설립과 훈련에 도움을 준 일이다. 당시 대한광복군 훈련의 책임을 맡은 이가 바로 황푸군관학교 1기 엘리트였던 후쭝난이다. 훗날 대한민국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99년 광복절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대신하여 아들 후웨이전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여 대신 수상하기도 하였다.

 

 

황푸군관학교의 명성을 이어가는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내가 역사 기록에서 접했던 이름 후쭝난과의 인연은 유학 간 타이완에서도 이어졌다. 내가 타이완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한 학교는 국립정치대학이다. 이 대학은 1927년 중국 난징에서 설립된 중국국민당중앙당무학교를 모체로 한다. 황푸군관학교라 부르는 중국국민당중앙군관학교가 ‘무관’양성의 요람이었다면, 내 모교는 ‘문관’양성을 위한 학교다. 두 학교의 첫 교장이 모두 장제스며, ‘친애정성’(親愛情誠)이라는 교훈도 공유하고 있다. 이 학교가 본디 ‘국민당 학교’임을 보여주는 것은 건물들의 이름이다. 중앙도서관의 이름은 장제스의 본명에서 유래한 중정도서관이며, 이셴이 본명인 쑨원, 장제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다이지타오, 한때 국민당을 좌지우지했던 천커푸 등 중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름을 딴 건물들이 있다. 이런 인연을 가진 곳에서 공부한 내게 자연스레 국민당, 장제스, 황푸군관학교는 익숙한 존재다.

국립정치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 교수를 알게 되었다. 후웨이전은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이 된 아버지와는 달리 국립정치대학 외교학과를 졸업 후 직업 외교관이 되어 ‘총성 없는 전쟁터’로 불리는 외교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타이완 외교부 정보사장(국장), 예빈사장(의전장), 주싱가포르 대표, 주독일대표 등을 거쳤고, 안보 분야에서도 활약, 국가안전국 부국장을 거쳐 타이완 국가안전회의(NSC) 비서장으로서 외교 안보 정책을 총괄하였다.
후웨이전은 외교관 생활과 병행하여 모교이기도 한 국립정치대학 외교학과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한국과의 오랜 인연을 소중히 여겼고, 한국 학생들에게도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그의 호의를 받은 학생 중에는 한때 나와 특별한 관계였던 한 여학생도 있었다. 그녀를 통해 후쭝난-후웨이전 부자와 한국과의 인연에 대해 좀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고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통해 후쭝난-후웨이전 부자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중정도서관

 

시골 노총각 교사 후쭝난, 키 작아 시험에 떨어질 뻔
<중국인 이야기 4>에는 장제스가 가장 신임했던 황푸 1기생 후쭝난이 등장한다. 요즈음 나이로는 40세 정도라 할 수 있는 29세라는 나이, 160cm도 채 되지 않는 왜소한 체격의 시골 노총각 교사 후쭝난! 그는 ‘엉터리 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청운을 좆아 황푸로 향한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 때문에 탈락 위기에 처한다. “근본적으로 군인 자격이 없다. 응시 자격이 없다”는 감독관의 말에 후쭝난은 한 마디로 일갈한다.

 

“나를 국민혁명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이유를 대라. 혁명은 청년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키가 혁명과 무슨 상관이냐. 나폴레옹은 나보다 키가 작았다. 쑨원 선생도 168cm밖에 안 된다. 당 대표 랴오중카이 선생도 나만큼 작다. 쑨원 선생의 주장이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너 같은 것들이 나라에 보답하려는 열혈청년들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중국인 이야기 4> 130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듯 방에서 후쭝난의 항변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그에게 외쳤다.

 

“대표 자격으로 너의 응시 자격을 비준한다.”
<중국인 이야기 4>  130쪽

 

그 사람은 바로 ‘당 대표’ 랴오중카이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황푸군관학교 1기생’ 대열에 당당히 합류한 후쭝난. 그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비록 체격은 왜소하고, 동기생들에 비해 나이도 많았지만 군인으로서 우수한 능력을 증명하였고, 이는 곧 교장 장제스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장제스의 동향인(同鄕人)이기도 했다. 황푸군관학교 졸업 후 후쭝난은 장제스의 신임과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승승장구하였다. 동기생 중 가장 먼저 ‘4성 장군’이 된 것도 그였다.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
그러나 제2차 국ㆍ공내전 시기 그는 공산군에 무려 50만 명의 대군을 전멸당하는 뼈아픈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우연인지 실책인지 고의인지를 두고 말이 많았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민당 내 공산당 간첩 슝샹후이의 모종의 활약이 있었지만, 후쭝난에 드리워진 의혹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1949년 국민당 정부의 타이완 천도 후인 1950년 후쭝난은 감찰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하고 패전에 대한 책임 조사를 받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죄 처분을 받았지만, 한때 ‘서북왕’이라 불리며 장제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영광의 시절은 끝이 났다. 교장 장제스는 더 이상 그를 신임하지 않았고, 한직을 전전하던 그는 1962년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는 조문조차 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후에도 인구에 회자되었다.
<중국인 이야기 4>에서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에 대한 여러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한다.

 

“후쭝난은 국민당군에 잠입한 공산당의 간첩이었다. 국ㆍ공내전이 한창일 무렵 가장 강력했던 중앙군을 지휘한 서북의 왕이었지만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간첩이 아니었다면 신무기로 무장한 50만 병력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와해된 이유가 뭔지 이해할 방법이 없다.”
<중국인 이야기 4> 137쪽

 

근래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을 본격 제기한 인물은 <대륙의 딸들>로 잘 알려진 장룽과 그녀의 영국인 남편 존 핼러데이다. 한국에는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로 번역ㆍ출간된 책에서 두 사람은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슝샹후이와 더불어 그의 상관 후쭝난이 국민당 내 공산당 간첩의 수괴라 주장한다. 이 책은 영문판 출간 후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는데, 문제는 타이완에서 생겼다. 타이완의 모 대형출판사가 책의 번역 판권을 산 후 상당한 계약금을 지급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약금을 지불하고 출간 계획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사건의 배후로 타이완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이 지목되었다. 후웨이전은 자신의 아버지를 공산당 간첩으로 지목한 이 책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당사자들이 공식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에 물증은 없다. 그럼에도 타이완에서 출간이 무산된 것은 후웨이전의 압력이 작용한 탓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중국인 이야기 4>에서도 김명호 선생님은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후쭝난과 ‘공산당 배후공작의 귀재’이자 ‘마오쩌둥의 장자방’저우언라이와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말이다.

 

“국민당 장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지휘관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후쭝난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시절 후쭝난은 정말 탐나는 인재였다. 공산당 입당은 거부했지만 내가 지도하던 연극반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왔다. 연기력도 뛰어났다. 나는 학생들 중에 공산당원의 명단을 제출하라는 장제스의 요구를 거부했다. 좌파 학생들에게 철퇴를 가하자 황푸를 떠났다. 장제스의 눈치를 보느라 배웅 나온 학생들이 좌우를 통틀어 한 명도 없었다. 내가 탄 쪽배가 섬과 육지의 절반쯤 왔을 무렵 부두에 헐레벌떡 달려와 손을 흔드는 생도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후쭝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어댔다. 연신 눈물 닦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중국인 이야기 4>  136쪽

 

 (저우언라이는) 이런 말도 남겼다.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국민당 고관도 한 사람 있다.”
<중국인 이야기 4>  137쪽

 

저우언라이가 지칭한 ‘국민당 고관’을 두고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다. 후쭝난은 이미 이야기한 대로 황푸 최초의 4성 장군이자 장제스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후쭝난이 국민당 내 공산당 간첩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김명호 선생님도 <중국인 이야기 4>에서 생각의 여지를 남기며 독자들의 애를 태운다.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궁금하지? 그러면 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봐요.” 그래서 <중국인 이야기> 제5권이 더 기대되는지도 모르겠다.

 

최창근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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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두 번째 이야기

 

중국인 이야기, 여적(餘滴)으로 쓴 역사

 

엇갈리는 운명의 드라마,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비공식 중국인명백과사전”이다.

 

권영숙(서양사학 전공/성광 컨설팅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본부장)

 

 

왼쪽은 <역사>를 저술한 헤로도토스, 오른쪽은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저술한 투키디데스.

 

  

 

 이야기라는 것, 역사라는 것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사실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사실이 말하게 한다"는 전제 하에 역사가의 주관을 배제하고 자신이 목격한 것과 들은 증언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견해라고 여겨지는 것들만을 기록하는 투키디데스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로서의 역사로, 자기가 목격한 것만 아니라 들은 풍문ㆍ신화ㆍ전설ㆍ지리ㆍ날씨 등을 폭넓게 전달한 헤로도토스적 전통이다.

  

  투키디데스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기술에는 잡다한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서문에서 자신이 쓰는 역사가 “대중의 찬사를 받고자 쓰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지식의 보고로 남기 위해 이루어진 사실의 집적이다”라고 표명했다. 또한 그는 역사를 국제적 상황이라는 정치적 현실관계 속에서 분석하려 했고, 우연ㆍ도덕ㆍ이념 등 인간적 요소로부터 발생되는 것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헤로도토스는 역사가 인간사를 다룬 이야기고 그 인간사는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페르시아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쾌히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 원인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실을, 사람들의 믿음을, 소문을 모두 나열해서 전쟁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투키디데스가 역사가들의 역사가였다면, 헤로도토스는 대중들의 역사가, 일종의 저널리스트였다. 이 두 전통은 본 것과 들은 것, 사실과 이야기, 사건과 사람, 인과관계와 우연, 기록과 교훈 등으로 대비되며, 역사 서술의 긴 줄기를 이어 왔다.

 


  랑케의 ‘실증사학’ 이후 학문의 한 분과 과목이 되어버린 역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은 투키디데스가 지적한 것처럼 낭만적이며, 공상적이고, 때론 일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역사가 집단 내부에서도 내러티브가 빠진 투키디데스적 역사서술이 역사의 영역을 한정시켜 버렸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들은 역사서술의 객관성을 의문시하고, 역사를 역사가의 해석의 영역에 놓으며, 미세한 이야기들이 거대 역사에 미친 영향을 중시한다. 바로 역사해석에서 ‘여담’이 갖는 유용성이 제기되었다.

 

  유쾌한 이야기꾼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유쾌한 이야기꾼이었던 헤로도토스를 떠올렸다. 이 책은 중국사의 여적(餘滴: 붓 끝에 남은 먹물이란 말로 쓰고 남은 이야기를 뜻한다)으로 가득 찼다. 그렇다면 사건의 인과관계를 사람들의 관계로 치환하며, 지도자들의 내밀한 생활과 뜬소문까지 담은 이 책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김명호 교수는 중국사를 직접적으로 혹은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이야기꾼처럼 사건과 사람에 얽힌 온갖 자료와 에피소드를 함께 전해줌으로써 독자나 연구자들에게 현대 중국의 모습을 바라보는 겹눈을 제공한다. 정치 경제적 구조를 우선시하는 꽉 짜인 인과관계의 역사에 상상력을 부여하고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바로 헤로도토스가 한 방법이다. 이런 서술은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하나의 사건엔 수많은 사람이 덩굴처럼 엮이고, 또 한 사람의 생로병사를 따라서 수많은 인간관계가 파생한다. 이러한 폭넓은 구조의 패턴은 읽는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다각도로 바라보게 해준다. 실제로 각 권의 이야기들은 같은 사건이 상반되어 보이게 서술된 것도 있다. 그 조각그림을 맞추어보면서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다.

 

 

 

 

 

  곡절 많은 사연, 활개 치는 우연

  <중국인 이야기 4>는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의 구금, 이른바 시안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국공합작의 산실 황푸군관학교, 마지막 황제 푸이의 마지막 행로, 신중국 건설 시의 북한의 중국공산당 원조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지만 김명호 교수는 역시 이 사건들을 이념이나 정치 상황으로 채우지 않고 등장인물들 간의 곡절 많은 사연으로 꽉 채운다.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역사에는 반드시 내러티브가 수반되고 또 교훈이 뒤따르며, 필연보다는 우연이 활개 친다. 그래서 이야기는 예측불가능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 인간사의 얽히고설킨 사연이 거대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시안사변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이미 역사적 팩트를 알고 있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을 일으켜 장제스를 구금한 장쉐량은 그로부터 내전중지와 항일전선을 위한 2차 국공합작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를 풀어줬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군사법정에 섰다. 국공합작의 지휘탑으로 다시 복권한 장제스는 돌아와 장쉐량을 구금해 그 후 50년간 연금한다. 이처럼 다 알고 있는 팩트들 사이에 발생하는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저자는 쑹메이링이란 정치력이 뛰어난 희대의 여인을 집어넣는다. 이 여인과 장제스와 장쉐량 간의 삼각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었던 상황을 모면시켰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시안사변 이전에 발생한 군벌대란 때 장쉐량이 장제스를 지지해 그의 중국 통일을 도운 것도 쑹메이링에게 받은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25세의 기혼인 장쉐량과 28세의 미혼인 쑹메이링과의 8일간의 만남은 강렬한 사랑의 의식(儀式)으로 남아, 생의 고비마다 살아 움직였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인간은 별것도 아닌 인연을 필연으로 만들 줄 아는 동물이다. 근 한 세기에 걸친 장쉐량과 쑹메이링의 인연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29쪽

 

  ‘신의 한 수’ 시안사변

  역사를 추동하는 인간의 힘을 믿는 역사가는 인간의 의지가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이 ‘신의 한 수’라 부르는 시안사변에 대해서도 저자는 중국인들의 민심이 내전보다는 항일에 기울었고 이에 공감한 장쉐량이 저우언라이와 접촉하고 구국의 쿠데타를 일으켰다면서, 장쉐량의 영웅적 결단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당시 국제 상황을 읽는 이들은 시안사변을 소련의 저우언라이를 통한 조정으로 읽는다. 그렇다면 누가 장제스를 살리고 누가 장쉐량을 죽음에서 구했던가? 과연 쑹메이링을 과부로 만들지 않겠다는 장쉐량의 결심이 장제스를 살렸는가? 관련 서술을 보자.

 

“1936년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사변이 발생하자 이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중국의 내전을 우려했다.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장제스가 죽기라도 한다면 중국은 내전에 휩싸일 것이다. 중국이 일본과 전면전에 돌입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소ㆍ만 국경을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국인 이야기> 제1권 197쪽

 

“내가 지금껏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쑹메이링의 보살핌 덕분이다. 나는 장제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사람은 나를 죽이려 했다. 나도 한동안은 잘 몰랐다. 존슨(Nelson Trusler Johnson: 1921~41년까지, 주중 미국대사 역임)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39쪽

 

“장제스 총살설 등이 연일 신문 지면을 도배했지만, 장쉐량은 저우언라이의 중재 아래 장제스를 풀어줬다. 장쉐량은 말년의 육성회고록-사후 공개된 1990~93년에 행해진 콜롬비아대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그(장제스)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풀어줬다’면서 그 생각은 변함없다고 회고했다. 시안사변을 중재한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인물이다. (내가) 살해되지 않은 것은 그의 덕택’이라며 감사했다.”

<조선일보>, ‘장쉐량이 말하는 시안사변 진상’, 2002년 6월 7일자

 

  바로 위의 두 진술은 장쉐량이 해금된 1990년, 즉 같은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하나는 소련과 저우언라이로 대변되는 상황을, 다른 하나는 쑹메이링과 장쉐량의 사랑이라는 인간적 요소를 생존 원인으로 들고 있다. 이런 외견상 상충되는 이야기도 50년이라는 긴 연금 기간을 생각해보면 상호 보완적 설명으로 읽을 수 있다. 장제스의 감정이 격해진 순간순간에 쑹메이링이 한 역할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연합에 성공한 후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위원장 장제스(앞줄 오른쪽)와 함께 난징의 쑨원 묘소를 참배한 장쉐량(앞줄 왼쪽). 1930년대 초반으로 추정.

 

 

  엇갈리는 운명의 드라마

  우리는 또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짧은 밀월기에 탄생한 황푸군관학교 이야기를 통해 장제스와 마오 그리고 린뱌오의 엇갈리는 운명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린뱌오는 장제스의 황푸군관학교가 배출한 최고의 군사 전략가였다. 장제스는 홍군을 택해 학교를 떠난 생도 린뱌오를 잃었고, 결국 그의 공격을 받아 중국 대륙을 잃었다. 린뱌오를 얻은 마오는 승리자가 되어 신중국을 건설했다. 이런 인간사의 엇갈림은 때론 역사의 엇갈림과도 맞물린다는 것이 이런 이야기의 교훈인 것이다. 아울러 책은 신중국이 자랑하는 불세출의 전쟁영웅 린뱌오의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장에선 일본군 천 명을 몰살하고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내쫓은 용장이 사실은 아주 수줍고 말이 없으며, 약골이란 사실을 동기생의 증언과 연애사를 들어 전한다. 그는 물, 바람, 빛, 소음을 두려워해 커튼을 친 사무실에 환기도 하지 않고, 대부분 집 안에 칩거하고, 음주가무를 도외시하며, 목욕도 하지 않고, 산수화조차 보지 않았다. 이런 그의 소심하다 못해 신경쇠약적인 모습은 훗날 린뱌오가 어떻게 문화혁명의 기수로서 마오 수첩을 만들어 마오를 홍보하는 데 열광하고, 탁월한 군사 에세이를 썼으며, 신중국에서 제2인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게 한다. 그는 과연 마오를 위협할 만큼 반역적이었던가. 그는 비전을 가진 지도자였던가. 과연 권력을 탐했던가. 주어진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이런 의문 앞에 우리를 서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숨은 이야기, 여담의 힘이다.

 

  자그마한 일화나 사건들이 그 자체의 일화로 그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일화가 의미 있는 징표가 되려면 그것이 거시적 담론과 연결되거나 혹은 사건의 진실을 캐는 데 일조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인 이야기 4>를 생소한 중국 현대사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역사학도라면 그것을 현대 중국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유용한 역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은 일종의 미시사다. 중국 현대사 개설서와 연표를 참조해가며 읽으면 우리는 인간의 목소리와 발걸음으로 가득한 현대중국사의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중국인이야기 4>의 백미는 정치 중심의 공적 역사의 그물을 빠져나간 여적(餘滴)에 있다. 이 여적의 역사가 주는 과외의 보너스로, 우리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사람살이의 독본을 읽는다. 그것도 평화 시가 아니라 혁명기의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속에서 친구와 적이 뒤바뀌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상황에 매몰된 사람과 그것을 이겨낸 사람, 두 얼굴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서 삶의 반면교사로 삼는다. 책 곳곳에 저자가 끼워놓은 촌철살인의 세평과 교훈적 잠언도 우리를 좀더 깊은 인간 이해의 장으로 인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완간되면 발자크가 그렇게 쓰고 싶어 했던 등장인물 2,000명의 인생교본 『인생희극』같은 책이 될 것이다. 여적(餘滴)의 역사, ‘비공식 중국인명백과사전’의 탄생을 기대한다.

 

 

 

   권영숙(서양사학 전공/성광 컨설팅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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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첫 번째 이야기

“독자가 써내려간 또 다른 ‘중국인 이야기’

차이니즈 나이트, 초여름 후끈한 열기 속으로!”

 

5월 28일,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의 출간을 기념하여 독자클럽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초여름 밤, 독자들은 상수역 한 카페에 모여 또 다른 ‘중국인 이야기’를 써내려갔습니다. 미처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이날 독자들이 나눈 열띤 토론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블로그에 소개합니다. 아울러 못 다한 이야기는 참석해주신 독자들이 직접 쓴 서평과 행사 후기로 이번 한 주간 한길사 블로그에 연재하겠습니다.

 

 




 

독자클럽 토론의 밤

독자,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

 

진행: 차현인(여의도 백상치과 원장, 페이스북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 회장)

패널: 강효백(대만 대표부, 주 상하이 총영사관, 중국대사관 외교관 역임, 현 경희대학교 법 과대학 교수,

                   <협객의 나라 중국> <차이니즈 나이트1ㆍ2> <중국인의 상술> <중국 각지 상인> 등의 저자)

        최종명(문화평론가, 중국여행전문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김경엽(백석문화대학교 중국어학부 강사, 독후감 대회 우수상 수상)

        이용석(성바오로병원 근무, <중국인 이야기> 열혈 독자)

        최창근(타이베이 국립정치대학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 현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 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

                  <대만, 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공저),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저자)

 

차현인: <중국인 이야기> 4권이 출간되고 정말 설렜습니다. 단숨에 두 번이나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셨나요?

 

최창근: <중국인 이야기>에는 국내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처음 소개되는 귀한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제4권도 아주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특히나 김명호 선생님의 다양한 참고문헌들, 즉 단행본을 비롯해 잡지와 영상자료들까지 그 전문성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김명호 선생님의 부지런함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김경엽: 4권을 읽고 1권부터 4권까지 등장인물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겹치는 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하나로 엮어지니 내용이 더욱 풍성해지고 인물의 일대기에 대한 이해가 쉬워졌어요.

 

이용석: 4권은 1,2,3권에 비해 분량이 줄었는데 내용적으로는 아주 만족했습니다. 평소 분단국가에 살면서 이념적 배타성과 한계를 느꼈는데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다룬 글을 보고 나니 그 한계를 극복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를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최종명: 10여 년 카메라를 들고 중국의 300여 개 도시를 여행하고 취재했습니다. 2013년, 이 책을 처음 알았을 때 정말 반가웠던 기억이 납니다. 중국의 근현대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김명호 선생님의 글쓰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김명호 선생님의 문체도 인상 깊었습니다.

 

강효백: 우리는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시안사변 이후 장제스는 왜 장쉐량을 죽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연금시켰는가?’ ‘중국에서 푸이를 보는 시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또한 영화 <마지막 황제>는 지극히 서양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한국인이 알아야 하는 중국인의 맨얼굴은 어떤 것인가?’ 등입니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의 현장 속으로

 

차현인: 강효백 선생님께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한 독자분께서 이런 말을 남기셨어요. “장제스와 장쉐량, 쑹메이링 세 사람의 관계를 너무 로맨스로만 몰아가는 것이 아니냐. 시안사변은 당시 여러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창근: 먼저 시안사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만에서 읽은 책 중에 탕더강(唐德剛)이라는 학자가 쓴 <장쉐량구술회고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장쉐량은 시안사변을 회고했는데요, 젊은 장군 장쉐량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동북군벌 장쭤린의 아들로 소원수(小元帥)라 불리던 장쉐량은 아버지가 일본에 의해 폭살당한 후 약 30만 명의 동북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장쉐량은 궁리 끝에 일본에 대한 '무저항정책'을 펼친 장제스에게 동북지방을 내어주고 근거지를 옌안으로 옮겼습니다. 청년 장군으로 국민의 신망을 받던 장쉐량에게 비난이 쏟아졌는데, 이에 장쉐량은 모욕감을 느낌과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배후공작의 귀재' 저우언라이에게 포섭되어 있던 양후청을 비롯한 측근들이 거사를 건의했고 그들과 도모하여 결국 시안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최종명: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사실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시안사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미 발생한 일이지요, 다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안사변은 공산당 입장에서는 ‘신의 한수’였다는 것입니다. 제2차 국․공합작과 항일전쟁 모두 시안사변으로 가능했습니다. 시안사변은 단순히 중국 국내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중국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쉐량은 장제스이 눈엣가시지만 죽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안사변을 함께 주도했던 양후청은 20세의 아들, 8세의 딸과 비서가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장제스에게 장쉐량은 풀어놓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훗날 장제스는 자신의 아들 장징궈에게 절대 장쉐량을 풀어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장쉐량은 50년이 넘게 연금 생활을 했습니다.

 




강효백: 저는 장제스에게 항일에 대한 진심성이 얼마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중 유일하게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에 대한 자긍심이 상당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본에 대해 호의적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장제스는 타이완과 만주까지는 일본에게 넘기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중국 내륙 침략까지는 두고 볼 수 없었겠지요. 장제스를 친일적 인물이라고까지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본에 매우 유화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장제스이기에 시안사변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양쯔강 이북까지 차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안사변은 중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제스가 장쉐량을 끝까지 죽이지 않고 연금만 시킨 것은 아마도 장쉐량에게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문이자 가혹한 형벌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영숙(독자): 시안사변은 좀더 국제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시 중국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외에 일본이라는 강력한 변수가 존재했습니다. 소련은 장제스가 내전과정에서 일본과 화친하면 일본의 예봉이 소련을 향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했습니다. 중국에 항일전선이 수립되길 바랐어요. 국공합작을 통해 세력이 미약한 중공 대신에 장제스가 항일의 총대를 매주기 바란 것입니다. 시안사변은 소련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반영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민심도 항일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역사적 사건을 이분법적인 이념론으로 보기보다는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황푸로 가자!

 

차현인: 독자 패널들의 여러 의견 잘 들었습니다. 중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인 만큼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데, 다음 기회에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제4권 표지에 재미있는 발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떠났다. 차(茶)도 식었다.” 이 말은 장제스가 린뱌오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합니다. 둘은 적대적 관계였는데 어떻게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제4권에는 장제스, 저우언라이, 후쭝난, 슝샹후이, 린뱌오 등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중국 혁명의 주역이 된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최창근: 개인적으로 후쭝난의 일화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장제스가 매우 신임했던 장군 중 하나인 후쭝난이 공산당과 싸운 옌안전투에서 어이없게 패배했습니다. 후쭝난이 간첩이 아니었다면 신무기로 무장한 50만의 병력이 공산당에게 패배할 이유가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장제스는 후쭝난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가 죽었을 때도 조문을 하지 않고 있다가 측근에 의해 마지못해 조문을 갔었지요.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은 자신의 아버지 후쭝난이 공산당의 간첩이었다는 내용의 책이 타이완에서 발간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떳떳했다면 굳이 막을 이유는 없었을 것 같은데, 후쭝난 간첩설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김경엽: 저는 “신중국 수립 이전의 역사는 황푸군관학교 출신끼리의 싸움이었다”는 김명호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특히 린뱌오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장제스에게 후쭝난이 있었다면 마오쩌둥에게는 린뱌오가 있었습니다. 제4권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린뱌오는 타고난 약골이었다. 황푸군관학교 학생 시절 새벽 구보에서 낙오하는 학생은 린뱌오가 유일했다. 거의 매일, 구보가 끝나면 교관에게 따귀를 한 대 얻어맞고서야 아침을 먹으러갔다. 동기생 사이에서 요즘으로 치면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156쪽

 

이런 린뱌오가 어떻게 중공 최고의 군사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개인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상호모순되는 길을 걸었던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제1권에도 ‘물과 햇빛과 바람을 싫어한 천하명장 린뱌오’라는 제목으로 린뱌오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장점은 처음에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인물의 일대기가 하나로 합쳐져 통합적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1권과 4권의 내용을 합쳐 간략하게나마 린뱌오의 일대기를 그려보았습니다. 1927년 제1차 국ㆍ공합작이 깨지면서 혁명 제1세대들이 곳곳에 흩어져 무장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지요. 그 후 실패한 사람들이 징강산으로 모여들었고 린뱌오는 이때 마오쩌둥과 대면하게 됩니다. 1934년부터 대장정을 통해 본격적인 혁명의 길로 들어섰고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매번 승리합니다.

장제스는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린뱌오의 목에 현상금 10만 원을 겁니다. 1936년 시안사변 이후 제2차 국ㆍ공합작과 항일 전쟁이 가능해졌고, 중국은 일본과의 싸움에서 린뱌오가 처음으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린뱌오에게는 ‘전쟁마귀’ ‘전쟁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일본군 군복을 입고 시찰하던 린뱌오는 국민당군의 오발로 머리에 총상을 입게 됩니다. 린뱌오는 치료를 받기 위해 1937~41년까지 두 번째 부인 류신민과 함께 소련에 머물렀습니다. 사회자님이 말씀해주신 이 책의 표지 발문, “사람이 떠났다. 차(茶)도 식었다”는 린뱌오가 소련에 머물던 시절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 시절 린뱌오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며 남긴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타고난 성격이 소심했던 린뱌오는 활발하고 외향적인 류신민과 다르게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했고 사교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하고 1941년 혼자 귀국을 합니다. 이후 마오쩌둥은 몸이 약해진 린뱌오를 더 이상 전쟁에 내보낼 수 없다고 판단해 항일군정대학 교장으로 임명합니다. 제4권의 전체 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해라. 혁명은 불(火)로만 되는 게 아니다. 활활 타오르려면 바람(風)이 필요하다. 신문을 발간하고,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어라. 그걸 할 사람은 중국 천지에 너밖에 없다. 린뱌오가 한 명인 것이 애석하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5쪽, 171쪽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항일군정대학 교장으로 임명하면서 한 말입니다. 린뱌오는 국ㆍ공내전 때 동북민주연군 총사령관으로 다시 전쟁터로 복귀하게 됩니다. 재래식으로 무장한 10만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미군의 원조를 받은 60만 명의 장제스 군대를 동북에서 몰아냈습니다. 신중국 수립 후 1959년 펑더화이가 실각하면서 린뱌오는 국방부 장관으로 부각, 1969년 공식적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됩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1971년 소련으로 향하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발표는 “마오쩌둥과 갈등을 겪던 린뱌오가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소련으로 가는 도중 추락했다”는 것이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궁으로 남아 있는데, 린뱌오와 마오쩌둥의 갈등은 󰡔중국인 이야기󰡕 제5권에서 다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린뱌오는 타고난 군사적 감각으로 마오쩌둥과 장제스 모두의 관심과 신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를 종합해봤을 때 그는 매우 소심하고 은둔적 성향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모순되는 지점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린뱌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여 독자: 저는 의견 다릅니다. 강효백 선생님께서는 장제스의 항일 전쟁에 대한 진심성을 의심하셨는데요, 저는 장제스는 시안사변이 아니었어도 끝까지 일본에 저항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장제스는 운이 없었습니다. 린뱌오가 뛰어난 장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장제스 옆에는 바이충시나 다이리 같은 린뱌오 못지않게 뛰어난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들이 폄하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효백: 맞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아야겠지요. 린뱌오를 이해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중국에서는 “구두족, 즉 후베이 지역 사람들은 뇌가 아홉 개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생각이 많고, 속을 알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린뱌오가 바로 후베이 사람입니다.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을 멋지게 불러주신 장재흥 독자님.

 

푸이, 두 번이나 이혼 당한 황제

 

최종명: 푸이에 대한 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영화 <마지막 황제>를 다시 보았습니다. 세계적인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영화지요. 그래서 당시 한국에도 개봉이 가능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극히 서양 중심적인 영화이고, 중국 내에서는 영화를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많았습니다. 푸이는 일본을 이용하면 청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주 괴뢰정부의 꼭두각시 황제로 살았고, 체포 전까지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요. 저는 중국 각지를 여행하며 특히 중국 황제들의 무덤을 여러 번 보게 되었습니다. 가보신 분들도 있으실 테고 짐작도 하시겠지만 굉장히 크고 화려합니다. 황제로 무덤에 묻힌 마지막 인물은 광서제입니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에 보면 푸이가 리위친과 이혼하고 전범관리소에서 나와 리수셴이라는 간호사와 결혼을 합니다. 푸이의 마지막 부인인데요, 리수셴은 푸이가 죽자 푸이를 청나라 황제로 인정하여 황제의 묘지에 묻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고 광서제 무덤 뒤쪽에 있는 사설 묘지에 묻혔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황제에서 평민이 된 푸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차현인: 푸이는 리위친 말고 원슈와도 이혼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슈와는 왜 이혼을 한 것이지요?

 

최종명: 푸이는 완룽, 원슈와 같은 날 결혼을 합니다. 푸이는 완룽보다 원슈를 더 좋아했습니다. 푸이가 청나라 황제에서 물러나 만주로 가기 전, 천진에서의 생활은 황족들 모두에게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원슈는 황족에서 평민으로 전락하는 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완룽의 질투를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푸이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 일로 푸이는 완룽을 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완룽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아편에 빠져 정신 이상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북ㆍ중 관계와 우리의 미래

 

차현인: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의 제4부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중국 수립에 북한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까요?

 

강효백: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6ㆍ25입니다. 중국은 소련과 미국에 맞서는 이 위험한 전쟁에 왜 참전했을까요? 단순히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 때문일까요? 사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렸고 친(親)소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마오쩌둥이 가장 두려워했던 나라는 미국이 아닌 소련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오쩌둥이 동북왕 가오강을 경계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국ㆍ공내전이 끝난 이후 동북 3성은 중국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남기고 간 전쟁 물자와 신무기, 군수 공장 등 모든 자원이 밀집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가오강도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매우 친소련적 인물이었습니다.

여기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의 표지를 보시면 문화대혁명 시기 린뱌오의 포스터가 있습니다. 동북 3성의 거리에는 이와 비슷한 가오강의 포스터가 난무했습니다. 그만큼 동북 3성 사람들에게는 마오쩌둥보다 가오강이 친숙하고 존경하는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마오쩌둥은 전쟁에서 밀린 김일성이 만주로 도망이라도 오는 날에는 만주는 미국과 소련의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소련과 미국이 중국 내지로 영향력을 넓히는 일은 순식간이겠지요. 마오쩌둥은 이것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비유하곤 합니다.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의 한쪽이 망(亡)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입니다. 그러나 원래 순망치한은 중국과 만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70년대 저우언라이가 외교적으로 이를 북한으로 확대 해석한 것입니다. 어쨌든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으로부터 만주를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전쟁터를 더 아래로 삼기 위해 북한을 도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큰아들인 마오안잉을 제일 먼저 전쟁터로 보내면서 솔선수범했고, 전쟁터에서 죽은 마오안잉의 무덤을 북한에 그대로 남겨 ‘피의 부채’로 삼았습니다. 물론 항일 전쟁과 신중국 수립에 북한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마오쩌둥의 진짜 속마음은 소련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북중관계는 1992년까지 혈맹관계였으나 한중수교 이후 감정이 틀어졌고, 결정적으로 1993년에 2000년 올림픽 개최지를 두고 시드니와 베이징이 경합할 때 북한이 공개적으로 시드니를 지원하면서 북중관계는 전통적 우호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북중관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예부터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좀더 적극적으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제도, 사람들의 성향을 알기 위한 노력은 결국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이미 한 발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중국인 이야기>는 삼국지보다 더 흥미로운 근대 중국인들을 다뤘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중국인 이야기>에서 현대 중국인들의 이야기까지 씌어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인 이야기>는 30권까지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차현인: 오늘 독자클럽 토론회의 사회를 맡으면서 사회자로서 내심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자 패널들께서 보여주신 이 토론의 열기를 느끼고 나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알찬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하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건전한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저자, 독자와 함께 책을 만드는 편집자

 

지난 5월 18일,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편집자로서 한 해에도 다양한 종류의 책을 만들어내지만 <중국인 이야기>에 대한 제 감상은 매우 특별합니다. 무엇보다 <중국인 이야기>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페이스북 독자클럽은 현재 회원 수 2,000여 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꾸준히 가입신청을 하고, ‘중국을 알고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마당’에 모여듭니다. 이곳에서는 <중국인 이야기> 등장인물과 주요 사건, 중국 소수민족, 중국 영화와 음악 등 각자가 경험한 중국에 대한 지식을 활발하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이야기와 볼거리가 풍성합니다.

 

행사는 예상 시간을 훌쩍 넘어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습니다. 일방적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모습에서 독자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열띤 토론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독자들의 눈빛이 아직도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중국인 이야기>는 시작부터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독자와 함께해온 책입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독자들은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독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전 10권으로 기획한 <중국인 이야기>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독자 여러분들이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짜이찌엔!(再见)

 

 

by 명랑 에디터 프시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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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중국인 이야기 읽어주는 편집자_2

전쟁을 하면서도 학문과 자유를 키운 시난연합대학

 

 

 

“대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다. 큰 학자가 있는 곳이다.”

 

시난연합대학 교수 메이이치가 남긴 말이다.

 

무슨 뜻일까?

 

그는 학습환경의 보장 외에 그 어떤 것도 정부에 요구하지 않았고, 간섭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대학은 교육부의 일개 과(科)가 아니다. 훈령대로 한다면 교수는 교육부의 직원과 다를 바 없고, 교육과정을 교육부가 정한다면 부장이 바뀔 때마다 창조와 개혁을 들먹이며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연구를 진행할 수 없고 학생들에게 혼란을 준다. 바꾸기만 하면 좋아진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을 보면 안타깝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바뀌는 교육 정책은 학부모와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해 각종 입시 설명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엄마들은 그만큼 뒤쳐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대학들은 어떤가.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큰 건물’ 짓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제 총장마저 기업인 출신이란다. 대학에 기업의 입김이 거세지고 신자유주의 논리가 적용되면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과들은 폐쇄된다. 역사와 철학이 1순위 되시겠다.

 

시난연합대학은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를 교과목에 넣는 데는 동의했다. 단 시험을 치르지 않았고 학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교육부의 교수자격 심사를 거부했고, 학장들은 필히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했을 때도 응하는 교수가 없었다.

교수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되는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지, 권력의 애완견이나 금력의 노예가 되지 않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전시에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배출한 시난연합대학의 기적은 우연이 아니었다…….

 

 

 

 

 

 

-<중국인 이야기1> 인용한 생각들...

 

 

by 명랑 에디터 프시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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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한길다반사2014.06.05 16:32

[서점이야기] 전주 홍지서림을 발견하다

 

 

편집자에게 서점이란 어떤 곳일까요?

애증의 상대인 책들이 모여있는곳? 시장조사의 전당?

아니면 내 월급이 나오는 샘?

여러 사람에게 각각의 의미가 있겠지만,

저는 수많은 사람 속에 섞인 내 자식을 맞닥뜨리는 장소인 듯합니다.

 

편집자가 서점에 가서 자기 회사 책을 본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잘키워 선 보러 나가는 아들 등짝을 보는 기분일겁니다.

미우나 고우나 정성들여 키운 잘난 내 아들 하는 뿌듯함과 

하지만 아무도 안 좋아해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지요.

(참고로 저는 미혼입니다)

 

그래서 편집자에게 서점은

번뇌의 순간마다 책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상담소이자,

잘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기도처이고,

우리 회사의 책을 객관의 눈으로 보게 하는 필터입니다.

 

전주 한옥마을은 제가 참 좋아하는 곳인데요,

오랜만에 한옥마을을 방문했다가,

전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형 서점이라는,

전주 홍지서림을 방문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를 경기전과 전동성당으로 생각한다면,

마을 권역의 가장 가장자리 쪽, 객사와 영화의 거리 쪽에 더 가깝습니다.  

바로 근처에 PNB풍년제과 지점이 있지요. (하단에 지도 첨부)

 

 

1963년부터 시작된 홍지서림은 지역의 향토서점 그 이상의 문화적 자산이다. 창업자 천병로씨가 전주시 경원동에 연 홍지서림은 당시 마땅한 서점 하나 없던 전주지역에서 단비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소설가 양귀자·은희경·고(故) 최명희 등 전주의 문청(文靑)치고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 책읽기’를 해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서점은 2000년대 초반 양귀자씨가 인수하면서 북카페를 만들어 문화사랑방 역할을 선도했다가 적자로 문을 닫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화정, [응답하라, 책 읽기] 책과 노는 사람들 - (하) 전주 지역 강소서점, 『전북일보

 

 

길을 걷다 보면 간판과 매장 분위기가 세련되어 금방 눈에 띕니다.

특히 저 책읽는 초록 외계인(?!) 무척 맘에 들어요.

제 인생을 바꿔놓은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님이 여기서 죽치고 앉아 책을 읽으셨다니

더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서점을 통해 수많은 민속자료들을 발굴하고 읽으셨겠지요...?

세련되게 리모델링 하기 전 서점의 풍경도 보고 싶어요.

 

 

매장이 꽤 넓었습니다. 코너도 잘 갖춰져 있구요.

구석구석 잘 되어 있어서 전체를 조망하는 컷이 잘 나오지도 않았고,

어쩐지 수상하게 보일까봐 대놓고 사진을 찍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여행객처럼 보이는 꾀죄죄한 여자가 핸드폰으로 찰칵찰칵 눈치를 보며 찍어댔으니

이미 수상하게 보고 계셨겠지요.

 

손떨리는 첩보 촬영의 결과물.jpg

 

제지당할까봐 조마조마해서 정말로 손이 떨렸네요.

2층 계단으로 올라가면 벽면에 이렇게 책 홍보 포스터도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만 봐선 정말 정갈해보이지 않는군요...(털썩...ㅜㅜ)

 

* 홍지서림의 베스트 셀러

 

대체로 3대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간 베스트 셀러 1위를 차지했던 여러 책들이 한자리에 사이좋게 모여있네요.

핀조명까지 떨어뜨려 주니, 베스트셀러 대접은 광화문 교보문고 못지 않습니다.

 

홍지서림 베스트셀러 

 

 

* 홍지서림의 역사 코너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코너를 보다 보니 역사코너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홍지서림의 특징이 분명해지는데, 유독 총론 격의 책이 많았습니다.

흥미로 역사를 소비한다면 미시사적인 책들이 많을텐데, 여기는 얼핏 봐도 총론이 많습니다.

제목이 아예 '중국사' '서양사' '미국사' '한국사'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한옥마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서점이니 전주의 문화재에 관한 책이 있을것이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재로 쓰이는 책들이 많이 있구나 생각해볼 수 있겠고,

또 전주 시민들은 역사책을 보실 때 지엽적인 부분보다 전체적인 맥락을 읽고 싶어하시는,

학구열이 넘치는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 홍지서림의 특이한 점

 

제 경험치가 정말 얼마 되지 않으므로 함부로 말할 부분은 아닙니다만,

신기하게도 계산대 바로 맞은편으로 핸디북 특선 코너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점에서 할인매대가 아닌 다음에야 핸디북을 이렇게 큰 코너로 만든 것을 처음 봅니다.

이동하면서 책을 읽으려는 수요가 꽤 있고, 실제로 매출과도 연결되는 게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핸디북은 가볍게 팔리는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멋진 방식으로 진열될 수 있다면 여러가지로 만들어볼수 있지 않을까요.

핸디북의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

 

역사코너 아래에서 찾아낸 한길사의 책

前 학진 담당자로서 반가웠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명저번역총서 시리즈에 중요하고 좋은 저작들이 많은데,

안타깝게 아직 많이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책장에 끼어서라도 많은 독자분들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가 하면 베스트셀러 코너 아래로 주문받은 책을 진열해둔 곳에

중국인 이야기가 딱!

전주에서 중국인이야기 1권과 2권 주문해주신 독자분, 감사합니다!

제가 편집한 책도 이렇게 주문 받은 모습을 어서 발견하고 싶네요.

보물을 찾은 기분!

 

우연히 발견하고 들어가게 된 홍지서림,

사실은 왱이집에서 콩나물 국밥을 먹고 나오다 발견했다지요.

 

사랑하는 왱이집 콩나물국밥! 모주 한 잔 크어~~~~

 

 

매콤하고 시원한 왱이집 콩나물국밥도 최고였고, 우연히 발견한 서점도 반갑고 기뻤습니다.

멋지고 훌륭한 대형서점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는 서점들에서 그 동네 분들의 세심한 취향의 결을 잠시나마 구경합니다.

동네 서점이 자꾸만 사라져 가는데,

전주권에 체인을 가진 홍지서림을 만나게 되어 뿌듯했습니다.

서점체인이 자꾸 없어져만 가는데,

이렇게 건재한 모습을 보아 또 반가웠구요.

혹시 전주에 가신다면, 먹거리 볼거리도 좋지만, 홍지서림에 한번 방문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음엔 또 어떤 길목에서 서점을 만나게 될까요?

기대됩니다.

by 편집자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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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 첫 돌 기념영상 개봉박두!


한길사에서 가장 사랑 받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김명호 선생님의 『중국인 이야기』.

얼마 전에 3권이 출간되어 ‘독자클럽의 밤’ 이른바 ‘차이니즈나이트’가 열리기도 했지요.

그때 페이스북 독자클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주신 몇몇 분들은

게스트로 무대에 등장하셔서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들려주셨고요.


『중국인 이야기』 페이스북 독자클럽이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회원도 1,500명을 육박해갑니다.

지난 1년간 있었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네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추억을 함께 공유할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만들어보았습니다.

이 저렴해 보이는 동영상의 제작자는 편집부의 명랑 에디터 PSYCHE입니다^^;


(속닥속닥) 재롱잔치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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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독자가 주인공이 된 차이니즈나이트

-내가 사랑한 중국인 이야기 그날, 그곳에

 

2012년 6월 8일, 『중국인 이야기』는 처음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1권이 출간된 후 독후감대회가 있었고, 저자와 함께하는 중국답사와 몇 번의 ‘차이니즈나이트’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제3권이 출간되어 다시 한 번 독자 여러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2014년 5월 14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차이니즈나이트’를 시작합니다!

 

이번 차이니즈나이트는 ‘내가 사랑한 『중국인 이야기』’라는 주제를 잡아보았습니다.

『중국인 이야기』 세 권이 출간될 때까지, 많은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이 있었고,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중국인 이야기』도 지금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독자분들이 읽어낸 『중국인 이야기』와 그에 담긴 추억을 꺼내보고자 합니다.

 

행사 시작 전 『중국인 이야기』를 읽고 있는 한 독자분.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노트 위에는 페이스북 독자클럽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요, ‘어떤 분일까?’ ‘가입은 하셨을까?’ 너무도 궁금합니다.

 

“지난 40년간 중국은 나의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놀이터였다.”

『중국인 이야기』의 가장 큰 강점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문체와 진귀한 사진입니다.  막힘없는 이야기, 주인공들이 남긴 주옥같은 어록과 현장감 넘치는 사진을 보면 ‘김명호 선생님이 정말로 중국을 놀이터로 여겨오셨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첫 원고를 마주했을 때부터 이 좋은 자료들을 가지고 사진전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이번에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겨서, 온라인에서 『중국인 이야기』 사진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사진전으로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주석의 심리를 살피느라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개인숭배는 위험하다.” “미국은 우리보다 대포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사진전에 쓰인 파일을 미리 공개했습니다. 역사의 보편 심리를 파고드는 명언이 가득합니다.

 

첫 번째 게스트 그룹은 『중국인 이야기』 제1권 독후감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후 저자와 함께 중국답사를 다녀오신 분들입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탄생부터 늘 함께해오셨지요.

 

(왼쪽부터) 명사회자 김민웅 선생님, 독자클럽의 톨스토이 김경엽 님, 『중국인 이야기』 전도사 김력균 님.

 

매너남 김경엽 님(백석문화대학교 중국어학부 강사)은 온화한 미소와 빼어난 글솜씨를 가진 분이십니다. 가끔씩 독자클럽에 올려주시는 글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나오게 합니다. 이날도 우아한 언어로 『중국인 이야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셨습니다. 김력균 님(OBS PD)은 급하게 오셨는지 땀을 흘리며 들어오셨지요. 세수 후 물기도 닦지 않은 채 앉으셔서 특유의 재치 있는 말투로 관중들을 웃게 만드셨어요. 진솔하면서도 소탈한 모습이 멋진 분이십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중국인 이야기』를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가”라는 김민웅 선생님의 질문에 “말로 하지 않는다. 주머니 털어 그냥 사준다. 그러면 재미있는지 2, 3권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사 본다!” 역시 전도사다운 답변이었습니다. ^^


두 번째 게스트 그룹은 페이스북 독자클럽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는 독자님들이십니다.

 

(오른쪽부터) ‘당시화의’의 주인공 조성환 님, 독자클럽 마스코트 최창근 님, 순수청년 이용석 님.

 

페이스북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에는 저자 못지않은 꾸준한 연재로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중 한 분이 바로 조성환 님(백석대 중국어과 강사)이신데요. ‘당시화의’(唐詩畵意)와 ‘중국 역대 여성시’를 올려주십니다. 매일매일 올려주시는 게시물 덕분에 회원들은 『중국인 이야기』를 넘어서 중국에 대한 지평을 다양하게 넓혀갑니다. 갑작스런 게스트 요청에도 불구하고 천안에서 흔쾌히 와주셨습니다. 기차 시간을 맞추시느라 뒤풀이에 참석 못 하셨는데, 더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최창근 님(한국외대 박사 과정)은 대만 유학을 하며 쌓은 중국에 대한 지식을 전파해주시는 분입니다. 젊은 나이에 걸맞은 감각적인 게시물과 댓글은 독자클럽의 분위기를 좌우합니다. 마스코트라는 별명이 괜히 붙지 않았겠지요? 대만 관련 책도 두 권 내셨습니다. 훗날 『중국인 이야기』도 뛰어넘을 좋은 책 기대하겠습니다.^^ 선한 인상을 지니신 이용석 님(성바오로 병원 근무)은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으로 평생 멍샤오둥을 사랑한 비밀결사 ‘청방’의 지도자 두웨성 이야기를 꼽아주셨습니다.(『중국인 이야기』 제1권) 남들은 무서워하는 두웨성의 조심스럽고도 진실한 마음이 이용석 님의 마음을 울렸나봅니다. 두웨성의 일화에 감동한 이용석 님 역시 순수한 마음을 지니신 분인 듯합니다. 두웨성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용석 님은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실 거예요. ^^


세 번째 그룹은 ‘시나브로 독서회’ 회원분들입니다. 시나브로 독서회는 매주 목요일 아침 새벽에 모여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입니다. 마침 이날이 독서회가 3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담당 편집자인 저보다 더 열정적인 독자분들 덕분에 저희가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시나브로 독서회가 『중국인 이야기』를 읽는 방법! 인물 계보도를 만들고 요점 정리한 내용을 공유한다. (오른쪽부터) 최태준 님(해태소방 대표), 권해진 님(래소한의원 원장), 이재연 님(건축 사업).

 

시나브로 독서회에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중국인 이야기』를 읽고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뒤얽힌 관계를 도표로 정리해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편집자인 저도 한 수 배웠습니다. 『중국인 이야기』가 어렵게 느껴지시는 독자분들께 이 방법을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신 저자 김명호 선생님.

 

마지막 게스트는 저자 김명호 선생님과 『중국인 이야기』 애독자로 참석해주신 박명림 선생님(연세대 정치학과 교수), 한길사 김언호 사장님이십니다. 독자가 중심이 되는 차이니즈나이트에서는 김명호 선생님도 게스트일 뿐이지요. “거짓을 쓰지는 않는다. 다만 사실은 과장되어도 괜찮다.” “중국에서는 청백리 위유런을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 중국에는 청백리가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직접 만난 독자들은 가끔 헷갈립니다. ‘그렇다면 『중국인 이야기』에 실린 내용이 진실이 아니란 말인가?’ ‘중국 사람들은 위유런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어렵습니다. ‘팩트는 있겠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진실은 없다. 최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위유런을 존경하고 본받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 부패한 관리를 욕하면서도 공직자가 되어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이런 뜻이 아닐까요?

김명호 선생님과의 대화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륙을 경험한 선생님께서 밤을 새도 모자랄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진리를 얻을 수는 없지만 곱씹어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계신 김명호 선생님.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은 풍랑 속에 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가슴에 대나무 한 그루씩 심자. 독자들이 우리를 감시한다!” -1946년 『관찰』의 창간자 언론인 추안핑(『중국인 이야기』 제1권)


독자의 사랑과 관심으로 ‘차이니즈나이트-내가 사랑한 『중국인 이야기』’ 행사는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날의 주인공은 ‘독자’ 여러분들이셨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분들을 비롯해 새로 만난 분들까지 모두 반갑게 만나 즐긴 축제의 현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더 새로운 에피소드를 가진 독자분들을 모셔보고 싶습니다. 차이니즈나이트의 주인공에 도전해보세요! 『중국인 이야기』 애독자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중국인 이야기』 파이팅! 독자클럽 회장 차현인(맨 왼쪽), 박창희(가운데), 김학명 님(맨 오른쪽 두 번째).

 

-Editor PSY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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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와의 만남]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 인터뷰

 

2014년 5월 12일자 연합뉴스에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의 인터뷰가 크게 실렸습니다. 『중국인 이야기』를 읽다보면 중국의 현대사를 쥐락펴락하는 호걸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한데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명호 교수도 만만치 않게 비범한 분이네요. 노년에 병들어서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마오쩌둥 못지 않은 독서가이기도 하고요.


『중국인 이야기』에 등장하는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만큼 흥미로운 '김명호 이야기'를 여기 소개합니다. 친절하고 흥미롭게 인터뷰를 풀어써주신 김보경 기자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중국인 이야기'로 '진짜' 중국 알린 김명호 교수

 



40년 중국 연구 집대성…'로마인 이야기' 능가한다는 평가 받아


"믿을만한 역사는 없어…중국은 사람 끄는 비장미 있어"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한길사 펴냄)를 읽다 보면 '과연 이 책을 한국인이 썼을까'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인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심도 있게 중국의 내면을 파헤치는 작업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40년간 중국을 '놀이터' 삼아 책·잡지·새벽시장·식당 등을 섭렵한 김 교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견줄만한 책을 만들려고 중국인 저자를 찾던 한길사가 김 교수를 만나 바로 책을 의뢰한 것은 출판계에서도 유명한 일화다.


'중국인 이야기' 3권이 최근 출시됐다. 총 10권을 목표로 재작년 첫걸음을 뗀 책은 2년 남짓한 기간에 '진짜' 중국 이야기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 '로마인 이야기'를 능가하는 대작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책 집필에 매진하는 김 교수를 최근 만나 연구와 집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중국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 방대함에 질렸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40년 동안 반복했다"며 "중국과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사람을 끄는 비장미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인 이야기'는 일기나 편지, 회고록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연대기가 아닌 인물열전 형식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한다. 중국 역사를 이끈 인물들의 목소리는 물론 이들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필요에 따라 에피소드 형식으로 묶기도 한다. 이 같은 구성은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김 교수는 "중국은 크면서도 역사가 길기 때문에 연대기 형식으로 풀면 지루할 수밖에 없다"며 "복잡한 나라를 복잡하게 설명하면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역사를 점 혹은 선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중국은 점으로 끊어서 보는 게 낫다"며 "그래야 웃으며 헤어지고는 뒤에서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중국인의 속성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설명에 걸맞게 책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3권은 장제스의 아들이자 대만의 총통을 지낸 장징궈(蔣經國), 중국 공산당주의운동의 창시자인 천두슈(陳獨秀), 대만 국민당의 원로이자 사랑받는 청백리였던 위유런(于右任), 중국 교육부장관이자 베이징대 총장이었던 장멍린(蔣夢麟) 등을 다룬다. 또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 삼형제의 숨겨진 불화도 그린다.


그는 "인물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다루고 싶은 인물에 대해 쓴다"며 "개인적 취향이 드러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 중 장징궈는 김 교수가 가장 힘줘 말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장징궈가 급사했던 1988년 1월 13일 대만 타이베이에 있었다. 김 교수는 빈소 앞에 6개월 동안 방을 잡고 장징궈를 추모하는 중국인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그는 "대륙 지식인들이 시진핑에게 대만의 장징궈와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할 정도도 대륙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장징궈가 대륙에 있었다면 총서기가 됐을 것이라고도 한다"며 "그를 장제스의 아들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46년 3월, 중공 근거지 옌안을 방문한 마셜 원수를 배웅하는 장칭(『중국인 이야기3』, 232쪽).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이자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장칭(江靑)도 김 교수가 가장 흥미있어하는 인물 중 하나다.


"장칭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제각각입니다. 장칭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고도 하고, 아주 표독스럽고 변덕스러웠다는 평도 있지요. 그녀는 베이징도서관에서 책을 가장 많이 빌린 여성인 동시에 예능적으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장칭, 린뱌오(林彪), 장쉐량(張學良) 같이 비극적 생애를 산 인물들에게 흥미가 가요. 이 사람들의 삶은 정의를 내리기 어렵거든요."

 

툭툭 끊어지는 단문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어체도 책의 특징 중 하나다. 교수들이 흔히 즐기는 만연체 문장에 익숙할 만한 그가 독자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은 힘들지 않았을까.


김 교수는 "늘여쓴다는 것은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것은 잘라버린다"며 "동양화의 여백처럼 독자가 직접 상상해서 채워넣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중국에 빠지게 된 계기를 물으니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한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 교수는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중국, 홍콩, 대만의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 자료를 모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계의 굵직한 인사들과 만나 생생한 뒷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그는 이들을 '문화노인'이라 부른다. 그는 기억에 남는 문화노인으로 루쉰 이후 최고의 작가로 불리는 첸중수(錢鍾書), 대서예가 황먀오쯔(黃苗子), 세계적인 화가 황융위(黃永玉), 시사만화가 딩충(丁聰) 등을 꼽았다.


김 교수가 이 같은 '화려한' 인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출판사 싼롄(三聯)의 서울지점 대표를 맡았던 덕이 컸다. 싼롄은 80주년 기념행사에 시진핑 국가 주석과 리커창 총리가 참석할 정도를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인문학 출판사다. 홍콩 싼롄은 매주 서점을 드나들며 중국 자료를 모으던 그에게 서울 싼렌 대표를 제안했다.


김 교수는 "싼렌에서 저를 외국인 중 가장 책을 많이 사간 사람이라고 하더라"며 "하도 책만 사가기에 도서관 직원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웃었다.


 

 

그의 책을 읽고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이야기에 누가 관심이 있겠냐'는 지적도 있었다. 책에는 그만큼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중국인들이 너무나 잘 아는, 중국 근현대사 이해에 필수적인 인물들이다. 중국인도 인정하는 '중국통'인 그는 이런 면에서 중국인이라면 마오쩌둥, 덩샤오핑(鄧小平)만을 떠올리는 한국인의 인식이 아쉽기만 하다.


김 교수는 "한국과 중국은 인접해있고,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중국인은 한국인과 많이 다르다.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3권 4부에 '중국과 북한의 끈끈한 속사정'이라는 주제로 북중 관계를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한국인은 북중 관계의 속내를 너무 모른다"며 김일성, 마오쩌둥 등 양국 지도자 간의 뿌리 깊은 인연을 자세히 설명한다.


김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중국이 북한의 자원을 노리고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해일 뿐"이라고 했다. 이어 "중국은 남의 나랏일에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며 "중국이 우리 남북문제 해결에 나서주길 원하는 것은 쓸데없는 바람일 뿐이다"고 일축했다.


중국 역사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은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놀랍게도 책에 실린 모든 사진은 김 교수가 중국, 홍콩, 대만 등의 골동품 가게를 돌며 직접 모은 것들이다. 그 수만 1만점이 넘어간다.


김 교수는 "실제 그 당시를 보여주는 것을 찾다 보니 사진이 가장 적합했다"며 "현장에 늘 답이 있다. 열심히 찾다 보면 없는 물건은 없었다"고 했다.

 

현장을 중시하는 그답게 팩트(fact)에 기반한 객관적 서술은 '중국인 이야기'의 가장 큰 힘이다.


김 교수는 "1차 자료를 정말 열심히 본다"며 "이해가 안 되면 수십 번씩 계속 들여다보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도 등 책의 내용을 신문과 잡지 등 공식 자료를 통해 일일이 확인한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도 매일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기는 중국인지라 자료는 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대조해보며 추측이나 불확실한 내용을 모두 없앤다.


그러나 객관적 서술에 간간이 끼어드는 유머러스한 인물평은 책의 묘미다. 그는 장멍린의 결혼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예나 지금이나 여자 나이 제대로 알아보는 남자는 드물다'라고 하거나 덩샤오핑을 의심쩍어했던 마오쩌둥을 두고 '대국의 최고지도자는 원래 이런 법이다'라며 촌철살인의 멘트를 곁들인다. 독자들이 그의 책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믿을만한 역사는 없다고 생각해요. 몇 백년 지나고 우리의 분단시대를 단군이래 가장 활력이 넘치고, 위대한 시대로 평가할지도 모르죠. 다만 역사 뒤에 숨겨진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vivid@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출처: 연합뉴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5/11/0200000000AKR20140511085000005.HTML?from=search)







『중국인 이야기3』독자클럽의 밤(5월 14일 수요일 저녁 7시 반, 정동 프란치스코회) 신청 -> http://hangilsa.tistory.com/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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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

『중국인 이야기』함께 읽고 페이스북에서 소통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1803~82)은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소중한 끈이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게 되죠.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연대와 공유의 힘을 느낀 적이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여기, 개인적인 독서가 그 어떤 모임보다 친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페이스북 그룹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입니다. 한길사에서 출판된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은 한 독자(차현인, 여의도 백상치과 원장)의 관심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현재 860여명의 회원들이 활발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에, 깊이 있게 읽는 습관까지


처음에는 『중국인 이야기』 책 이야기로 시작된 것들이 지금은 책 뿐 아니라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한시(漢詩), 문학에서부터 문화·예술계 전반, 그리고 정치와 뉴스까지 중국에 관련된 것들이라면 독자 스스로 글을 올리고 서로 공유를 합니다. 요 근래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포스팅은 바로 중국식 짜장면인 챠오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댓글에 댓글이 더해져 한국식 짜장면과 챠오몐의 차이점, 맛 그리고 조리법까지 이어졌으니 포스팅(▶바로가기) 하나로 중국인들의 생활까지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지요. 



▲『중국인 이야기』페이스북 독자클럽에서 화제가 됐던 '챠오몐 VS. 짜장면' 1박 2일 모임 




그리고 더 재미있었던 것은 이 포스팅이 초래한 예기치 못한 결과였습니다. 끊이지 않는 논쟁을 보다 못한 중국통 이순익 독자가 “이번 주말에 저희 집에 오셔서 차오몐, 짜장면 다 드셔 보시고 판단하세요.”라며 모임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포스팅이 독자클럽의 첫 번째 번개모임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날의 번개 모임(▶바로가기)은 끊이지 않고 나온 중국음식과 중국 정치·문화에 대한 토론으로 1박 2일이 풍성했다고 합니다. 





『중국인 이야기』로 페이스북에서 소통하는 독자클럽 멤버들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은 일반적인 독서 모임과는 달리 저자와의 만남, 강연, 역사기행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합니다. 회원들 간의 잦은 만남과 대화가 이 모임이 계속 번창해 가는 비결인데요. 지난 7월 10일 저녁, 홍대 모처에서는 시끌벅적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한길사에서 주최한 <차이니즈나이트>(▶바로가기)였는데요. 『중국인 이야기』의 김명호 저자가 독자들과 함께 중국 공산혁명의 선두자인 ‘천두슈’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명호 저자는 필력만큼이나 탁월한 입담으로 여름밤을 채웠는데요. 사회자로는 독자클럽의 차현인 독자가 나서 더욱 눈길을 끌었습니다. 



『중국인 이야기』저자 김명호 교수의 차이니즈 나이트




이렇게 행사 때마다 독자 스스로가 주축이 되어 참여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고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도 독자클럽이 가진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차현인 독자는 스스로를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 열혈 운영자로 칭하며 “본업은 독자클럽 관리, 부업은 치과의사”라고 소개를 할 정도니 그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공통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뭔가 생활의 활력이 될 것 같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지금 바로 클릭하세요. ^^



▶ 페이스북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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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다반사2013.07.24 09:01


'차오몐 vs. 짜장면 논쟁'에서 이어진 

전광석화 번개모임



2013년 7월 20일은『중국인 이야기』 페이스북 독자클럽 첫 번째 번개모임이 있던 날입니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진행된 이번 모임의 시발은 무엇일까요? 클럽 게시판을 열심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7월 15일 원광식 독자가 올린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중국식 볶음면 차오몐(炒麵 초면) 사진이었는데요, 아직 차오몐을 못 드셔보신 다수 독자들을 약 올리기 위해 올라온 이 한 장의 사진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역사의 시작은 항상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실증해 주었달까요. 

 

이 한 장의 사진은 ‘차오몐 vs. 짜장면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차오몐이 낫다’는 독자와 ‘그래도 짜장면이지’ 하는 독자 간의 격렬한 댓글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병주 독자가 본격적인 불을 댕긴 분이었지요. 발언을 인용하자면 “짜장면을 어따 대나요? 차오몐 쥑입니다. 숙주도 사각사각 식감 좋고.” “정말 짜장면보다 맛있나요?” 라고 댓글을 단 우난경 독자께 이리 말씀하신 거였지요. 여기에 찔끔한 우난경 독자가 “짜장면 안 갖다 댈게요”라고 한 걸음 물러서자, 이병주 독자는 “삼선 짜장이라면 모를까, 간짜장, 유니짜장 안 받아줍니다”라며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려 했지요.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바로가기)




이렇게 차오몐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듯하던 ‘면(麵)의 전쟁’에, 강호(江湖)에 은거하다 홀연히 일어난 분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익 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은 “맛은 주관이다”라는 진리를 강조하며, “짜장면이 더 맛있다”고 강력 주장했고 이에 저도 나름 객관적인 판단을 가지고 짜장면에 한 표를 던져, 기울어져 가던 대세를 뒤집어보려 하였습니다. 


차오몐파의 고수(高手) 이병주 독자의 선제공격과 짜장면파의 거두(巨頭) 이순익 독자의 대응공격 양상으로 전개된 ‘면의 전쟁’은 예기치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논쟁을 보다 못한 이순익 독자가 이런 제안을 하신 것이죠. “좋아요, 그러면 주말에 저희 집에 오셔서 차오몐, 짜장면 다 드셔 보시고 판단하세요.” 그리하여 한 장의 사진이 첫 번째 독자클럽 번개모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드미마을로 가는 길


‘면의 전쟁’이 야기한 첫 번째 번개모임 장소는 이순익 독자가 사는 ‘강호(江湖)의 땅’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고드미마을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본향(정확하게는 신채호 선생 조부님이 사셨던 곳)으로 지금은 단재기념관과 선생 묘소가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7월 20일 오후 2시 30분 고드미마을로 가기 위해 ‘시커먼스 구단’ 소속 남자 6명이 서울 남부터미널로 모여들었습니다. 『중국인이야기』교(敎) 수석 전도사 차현인 독자(여의도 백상치과 원장), 이창주 독자(상하이 복단대 박사과정), 이윤희 독자(사업가), 이규호 독자(조선족 출신 전직 중국 공안), 양해승 독자(서울대 박사과정) 그리고 제가 만났습니다. 1시간 30분여를 달린 끝에 버스는 청주시 가경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청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미원(간이)터미널로 가는 버스로 갈아탄 후 약 40분, 거기서 다시 택시를 타고 5분여를 가서 드디어 고드미마을 이순익 독자 댁에 도착하였습니다. 김원일 선생 소설 제목처럼 ‘마당 깊은 집’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댁의 핵심 포인트는 바로 돌 너와. 너와하면 보통 나무로 만든 것을 떠올릴 텐데, 이 지역 가옥들은 지역 특산품인 돌을 이용하여 지붕을 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돌너와집입니다. 







용정차, 고산차, 더우장


반갑게 맞아 주시는 이순익 독자의 안내로 거실을 겸한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서재에는 각종 책들과 다구세트, 그리고 고목으로 만든 응접실 세트가 놓여 있었습니다. 한켠에는 여전히 ‘동심의 세계’를 갈구하시는 이순익 독자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만화책들도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번개모임을 주선하여, 이틀 동안 먹이고 재우고 때로는 마시게 해주실 분께 차현인 독자와 저는 감사의 의미로 읽으실 만한 책 몇 권을 선물로 준비해 갔습니다. 간단한 선물 증정식을 시작으로 ‘번개모임 공식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일정은 ‘차 마시기’, 중국 항저우(抗州 항주)를 대표하는 명차(名茶) 용정차(龍井茶)와 더불어 대만 아리산(阿里山) 청정지역에서 재배되는 고산차(高山茶)를 내어 주셨습니다. 차를 담아 내어주신 다구세트는 겉보기는 투박하지만 볼수록 매력 있었는데, 모두 이순익 선생이 직접 만든 것이라 합니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 『중국인 이야기』 편집자한길사 김지연 에디터가 도착하였습니다. 투철한 애사심을 발휘, 휴일임에도 독자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날의 드레스코드는 ‘레드’. 중국을 대표하는 색이죠. 나름 의미 부여를 하자면, 중국 문화대혁명(1966~76) 시기 홍위병의 마스코트 ‘소홍귀(小紅鬼) 패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지연 에디터가 도착하자 이순익 선생은 시원한 더우장(豆醬 두장, 중국식 콩음료)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날 먹은 본격적인 중국음식이었죠. 더우장은 중화권(중국, 대만 홍콩 등)에서 주로 아침에 먹는데, 기본은 따뜻하게 해서 먹지만,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하게 해서 먹기도 합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요타오(油條 유조, 길쭉한 중국식 밀가루 튀김)입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벌어진 대화의 향연 


차와 더우장으로 입가심을 한 후, ‘대장금’ 이순익 선생의 본격적인 요리 솜씨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메인 요리로 깐쇼새우(干燒大蝦, 새우튀김)와 제왕(帝王)족발, 바이차이(白菜 백채, 배추) 볶음 요리가 차례로 나왔습니다. 맛은 직접 ‘형용할 수 없이’ 맛있어서 제 글 솜씨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반주(飯酒)로 정말 맛있는 막걸리 한 통과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고) 특산주 ‘중화영성’(中華寧城)이 올랐습니다. 중화영성은 45도짜리 바이주(白酒 백주)로 보통 ‘빼갈’이라 부르는 바이주 중에서도 고급품입니다. 






맛있는 요리가 차례로 오르는 사이, 적당히 술기운도 오르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습니다. 그러다 격렬한 논쟁의 서막이 올랐지요. 논쟁의 주제는 ‘중국 정치’.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중국은 공산당 영도하의 계급국가인가 아닌가?’ ‘한족(漢族)은 특권적 지배 계층인가?’ ‘중국 내 소수민족은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나 차별대우를 받고 있나?’ 등이었습니다. 이날 유일한 중국인 참석자인 양해승 독자와 중국 유학중인 이창주 독자, 조선족이신 이규호 선생이 주토론자였고, 이순익 선생의  지인으로 철학적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 조일현 선생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본디 전공을 살려, 철학적 이론에 바탕을 두고 중국의 현실 정치를 평가해 주셨죠. 중국 분도 있고 대화의 주제가 민감하다면 민감한 주제라 토론 양상은 상당히 격렬해졌지만, ‘우리는 중국을 더 알아야 한다, 많이 배워야 한다’로 결론이 정리되고, 서로 웃으면서 끝났습니다.


토론 주제로 입으로 ‘지지고 볶는’ 사이, 이순익 선생은 또 주방으로 가셔서 요리재료들을 ‘지지고 볶고’ 삶아, 오늘 모임을 있게 한 차오몐과 짜장면을 준비하셨습니다. 짜장면이야 대중적인 음식이고 차오몐도 흔하지는 않지만 한국서도 맛볼 수 있는 요리인데, 이순익 선생이 만든 차오몐과 짜장면은 정말 환상이었습니다. 좋은 재료로 정성 들여 솜씨 있게 만드신 것이라 이제까지 먹어 본 차오몐과 짜장면이랑 비교가 안 될 만큼 맛있었습니다. 






다들 먼저 먹은 음식들로 배가 상당히 부른 상태였으나, 다들 맛있게 먹고 오늘 모임의 주목적인 ‘차오몐이냐 짜장면이냐’를 가리기 위해 점수 매기기에 들어갔습니다. 결과는 차오몐의 판정승! 저와 이순익 선생을 제외한 다른 분들이 모두 차오몐에 손을 들어주셨네요. 


‘면의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차오몐과 짜장면을 먹는 사이, 어느덧 밤은 깊어갔습니다. 김지연 에디터는 집으로 돌아가고, 번개모임 제2라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목은 ‘술의 전쟁’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막걸리를 두고 모여 앉아 한 잔씩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동안 손님맞이 준비를 하느라 힘드셨을 이순익 선생도 평소 좋아하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기 시작하셨죠. 여기에 저와 저의 따거(大哥, 큰형님) 양해승 독자 등이 가세했지요. 중간에 이순익 선생이 잠을 청하러 가자, 결국 저와 양해승 따거 둘만 남았죠. 제가 ‘따거 따거’ 하면서 약 올리기도 하고 술도 자꾸 먹여서, 양해승 독자는 고생 꽤나 하셨습니다. 자꾸 술을 권하면서 잠도 안 자고 힘들게 하니, 양해승 님이 이러셨죠. “제발 자요. 따거 말 들어야지.” 그렇게 저는 3시경 ‘강제 취침’에 들어 제2라운드도 끝났습니다. ‘말통에 남은 막걸리 다 마셔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지만, 결국 5분의 1 정도는 남았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을 뵙다 


다음날 아침 메뉴는 쌀죽과 더우장, 유타오, 짜장면 소스, 차오몐 등이었습니다. 아침식사도 정말 푸짐하고 맛있었죠. 아침식사를 마치고 독자들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마을 입구에 있는 단재기념관입니다. 우리나라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일대기를 자료와 연표로 정리한 곳입니다. 거기 담당자께서 이순익 선생 손님들이라고 관련 영상물도 보여 주시고, 직접 설명까지 해 주셨습니다. 






단재기념관 관람을 마친 후에는 바로 옆의 신채호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가서, 일생을 조국의 계몽과 독립을 위해 노력하시다 중국 뤼순(旅順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고인께 향도 올리고 묵념도 드렸습니다.





이순익 선생의 대만 유학생활 이야기


기념관 관람과 참배를 마친 후 이순익 선생 댁으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시원한 수박과 건강효소음료를 주셨습니다. 수박을 먹으며 다시 대화의 향연이 이어졌습니다. 주 화자(話者)는 이순익 선생이었는데, 1980년대 대학 시절부터 대만 유학과 중국에서의 교수생활, 동학(東學)과의 인연,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대만에서의 ‘눈물 나는’ 유학생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순익 선생은 1983년 대만 유학길에 올라 1989년 동오대학(東吳大學) 중문연구소(중문학 대학원, 중화권에서 대학원은 ‘연구소’라 합니다)를 졸업했습니다. 1992년 이전 중국 본토 유학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중국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자유중국’으로 불리던 대만으로 유학 가는 것이 보편적이었지요. 여기서 잠깐, 동오대학은 대만을 대표하는 사립대학 중 하나인데, ‘동오(東吳)’라는 이름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 ‘동쪽 오나라’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원래 이 학교가 위치한 곳은 ‘동쪽 오나라’ 지역인 저장(浙江 절강)성 쑤저우(蘇州 소주)로, 개신교계 선교사들이 세운 중국 내 첫 번째 사립대학입니다. 쑤저우는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514년 오나라 왕 합려(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의 두 주인공 중 한 사람)가 도읍지로 세운 곳입니다. ‘동오’라는 지명의 기원이지요. 그런데 이 동오대학의 원래 이름은 ‘쑤저우 대학’이었습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완전히 패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주할 때 이 대학 교수진과 학생들도 대만 타이베이로 옮겨가 재개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 쑤저우에도 ‘쑤저우 대학’이 남아 있지만, 대만으로 옮겨간 ‘동오대학’의 영어명도 똑같이 ‘Soochow University’(쑤저우 대학)라고 합니다. 


동오대학에서도 중문학과는 선생들이 악랄하게 공부시키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중국어 방점, 구두점 찍기’ 과제물 때문에 다들 눈물 나는 유학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들이 석/박사 논문이 통과 되어도 과제물을 다 하지 않으면 졸업 시키지 않겠다고 했다네요.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쳤기에 동오대학 졸업생들이 탄탄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겠지요. 이순익 선생 표현대로라면 “동오대학 출신들 중에 밥 굶는 사람은 없다”고 하니까요. 


이순익 선생의 석사졸업논문 주제는 원(元)대 희곡으로, 정확하게 제목을 옮기자면 「원대사인극연구」(元代士人劇硏究)입니다. 선생 설명에 따르면 몽골족이 세운 원(元) 통치하에서 차별받고 멸시받던 한족 독서인(지식인)의 생각과 울분을 알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몽골의 원은 계급을 출신성분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몽골인-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강남인(江南人)입니다. 몽골인과 색목인은 지배계급이었고, 남송(南宋) 멸망 이전에 귀화한 한인과 남송 멸망 후 복속된 강남인은 피지배 계급이었죠. 



▲이순익 선생과 석사졸업논문「원대사인극연구」(元代士人劇硏究)




그중 끝까지 저항하다 무너진 남송 사람들인 강남인에 대한 차별은 컸고, 전통적인 한족(漢族) 지식인에 대한 차별도 극심했습니다. 유학자(儒學者)의 사회적 신분은 거지나 창녀 수준이거나, 되레 그보다 못했습니다. 때문에 독서인이라 불리던 지식인들은 마음속으로 울분을 삭히며 살아 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순익 선생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를 연구하셨다고 합니다. 





서울로 가는 길, 또 한 번의 논쟁


시원한 수박까지 다 먹고 나니, 어느덧 오후 3시에 가까워 오고, 일행은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청주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콜밴 속에서 중국에 대해서는 너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독자들은 그 찰나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작년 이맘때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보시라이(薄熙來 박희래) 전 충칭(重慶 중경)시 서기 스캔들. 공산당 간부의 부패 문제, 보시라이는 정치적 희생양이나 아니다 문제, 보시라이와 그의 측근이었던 충칭시 경찰국장 문제, 소수민족 차별(?) 문제 등등으로 짧지만 격렬한 불꽃이 튀었습니다. 


그렇게 30분여를 달린 끝에 다시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 서울행 버스를 타고 원래 출발지인 서울 남부터미널로 돌아와 ‘자이지엔’(再見 재견, 헤어질 때 인사)하며, 각자 목적지로 향하는 것으로 ‘1박 2일’에 걸친 첫 번째 번개모임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 본문의 중국어 표기는 한국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랐습니다. 실제 발음과 차이가 있으나, 통일성을 위해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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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史)와 야사(野史),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의 차이니즈 나이트



삼성경제연구소가 추천하는 '휴가때 CEO가 읽어야 할 책'에 당당히 2권 모두 선정된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의 강연이 지난 7월 10일 홍대역 근처에 있는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렸습니다. 차이니즈 나이트(Chinese night)란 타이틀로 진행된 이번 강연은 6월에 있었던 첫 번째 강연에 이은 두번째 차이니즈 나이트였습니다. 강의 시작 한참 전부터 강의실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더니 강의 시작 시간에는 백 여명의 사람들로 강의실이 꽉 찼습니다. 


 

 



 

이 날 페이스북 그룹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바로가기)의 멤버라면 굉장히 반가운 얼굴을 만나실 수 있었습니다. 차이니즈 나이트의 사회를 맡아주신 분이 차현인 독자였거든요!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의 핵심 운영자로 맹활약 중인 차현인 독자가 김명호 교수와『중국인 이야기』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차이니즈 나이트의 사회를 혼쾌히 맡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의 뜨거운 성원에 보답하는 건 재미있고 유익한 강연을 들려드리는 거겠죠? 이 날 강연 주제는 '천두슈(陳獨秀)'였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추천 도서에 당당히 선정된 『중국인 이야기』1, 2권에 이어 시리즈로 출간될 다음 『중국인 이야기』에 소개될 인물이기도 하죠. 『중국인 이야기』에서 중국혁명사의 주역과 조연들의 내면을 딱딱하게 풀지 않고 생생한 이야기 방식으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김명호 교수의 스타일대로 이 날 강의도 진행됐습니다.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넘나들며 중국 공산당 창당의 핵심 인물이자 공산주의 이론의 대가인 천두슈의 공적 활동 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뒷 이야기까지 종횡무진 풀어놓는 김명호 교수의 강연에 사람들이 모두 퐁당 빠졌거든요.


 

▲차이니즈 나이트 사회를 맡아주신 차현인 독자(위)



천두슈에 대한 유익하고 알찬 강연 사이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잘 버무리는 김명호 교수의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죽고 나서야 조금씩 재평가 받기 시작한 천두슈는 알려진 것이 많이 없는 미스테리한 인물입니다. 사진도 그래서 별로 없죠. 소위 말하는 '스펙'도 없이 북경대학 교수가 된 비결이라든가, 3번 결혼하게 된 사연 같은 이야기가 그래서 더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바로가기)의 열혈 멤버 중 한 명인 최창근 독자는 '중국을 놀이터로 삼으신 '60대 소년' 같은 김명호 선생님의 강연이라 뻔하지 않은 재미가 있었다'며 '김명호 선생님의 강연을 듣다보면 중국 공산당 원로 천두슈의 근엄하고 지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인간 천두슈를 볼 수 있었다'고 하시네요. 또, 첫 번째 차이니즈 나이트 이후 두 번째 들었다는 진의령 독자는 '특정 인물 하나를 정해 깊이 있게 이야기를 들려줘서  재미있었다'며 '다음 강연이 있다면 또 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차이니즈 나이트 뒷풀이에 참가한 사람들(ⓒ김학명), 최창근 독자(왼쪽), 진의령 독자(오른쪽)




평일 저녁, 한 시간 반에 이르는 강연 시간 내내 꽉 들어찬 강의실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김명호 교수와 몇몇 분들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 날 강연 내용이었던 천두슈와 중국 등 온갖 이야기를 하며 강연이 끝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직업도, 나이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라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답니다! 혹시 이 날 강연에 참가 못하셔서 아쉬운 분이 있다면 다음에 있을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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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SERI 선정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중국인 이야기』

 

 

매년 여름 휴가 때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CEO가 휴가 때 읽을 책'에 『중국인 이야기』1, 2권이 모두 선정됐습니다! 저자 김명호 교수가 수집한 진귀한 사진과 함께 중국 근현대를 인물로 이해할 수 있는 『중국인 이야기』. 올 여름 필독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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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윤리와 생태학적 보고서

김언호의 『책의 공화국에서』를 읽고



언호의 『책의 공화국에서』는 20대를 1980년대에 보낸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 온다. 지난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는 타임머신과 같다. 나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오래된 책들을 하나씩 꺼내 펼쳐 본다. 먼지가 쌓인 책들은 모서리가 닳아있고, 색 바랜 페이지마다 묵은 종이냄새가 피어난다. 


『한국사회연구』· 『1950년대의 인식』·『우상과 이성』·『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해방전후사의 인식』 그리고 또 많다. 책갈피 속에는 지난 시절 나의 작은 독서체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붉은 펜으로 그었던 밑줄들과 페이지의 여백에 메모했던 글씨들이 천년의 잠처럼 고요하다. 밑줄들은 색 바랬고, 글씨들은 희미하다. 오래된 책들을 새삼스럽게 펼쳐 본 것은 『책의 공화국에서』를 읽고 난 직후 잦아들지 않는 여운 때문이었다. 여운은 오래 묵은 서향(書香)과 뒤섞여 방 안의 공기 중에 부유한다.  김언호는 『책의 공화국에서』의 성격을 스스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출판인 김언호(오른쪽) ⓒ준초이




“이 작은 책은 시대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시대상황을 보다 아름답게 구현해내려는 현인들과 펼친 한 출판인의 출판운동보고서다.” (18쪽)



『책의 공화국에서』는 지난 7,80년대의 함석헌 · 윤이상 · 송건호 · 리영희 · 이오덕 · 박현채 ·안병무 등 당대의 지성과 지식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저자는 이들을 ‘현인’이라고 부른다. 저자와 현인들과의 만남과 교류, 함께 나눈 지적 모험과 실천과정이 저자의 육성을 통해 울려 퍼진다. 그의 생생한 육성은 우리를 단박에 지난 7,80년대 엄혹했던 정치사회 상황 속으로 휘몰아 간다. 그 중심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있다.





빼앗긴 ‘500권’, 압수된 진실과 양심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은 단지 수많은 책 중의 하나가 아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기표(記表) 속에는 수많은 기의(記意)가 용솟음치고 있다. 역사와 시대 앞에서 책이란 서물(書物)이 겪어야 할 시련과 수난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1979년 10.26정변 직후 계엄령 시기, 김언호는 ‘정신의 자식’ 같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제1권 500여 권을 용달차에 싣고 문공부로 향한다. 판금 당하고, 압수당한 것이다. 압수된 것은 그냥 500권의 책만이 아닐 것이다. 압수된 500권은 폭력의 시대 속에서 압수된 진실과 양심이며, 강탈당한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2004년 김언호는 빼앗긴 책들을 찾기 위해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4반세기만이었다. 우리는 이 편지글 속에서 한 출판인이 책에 대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생각들과 마주치게 된다.






“한 권의 책에도 인권이 있을 것입니다. 귀중한 정신의 창작인 책을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 유폐시켜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본인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제1권을 기획한 출판인으로서 어두운 창고 어딘가에 유폐되어 있을 그 책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한 권의 책은 살아 있는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입니다.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가 햇빛 아래서 숨 쉬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제1권 500여 권을 저희 출판사에 제대로 돌려주는 일은 지난 날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으면서 우리시대의 고귀한 지성을 존숭하는 상징적인 문화정책의 일환이 될 것입니다.”



위 편지글 속에는 한 출판인의 책에 대한 철학, 책과 시대정신, 책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인식이 온전히 담겨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장에서 사라져간 ‘인혁당사건’의 사형수들이 32 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듯이 압수된 500권을 되돌려 받을 때, 김언호가 신뢰하는 마르크 블로크의 ‘희망의 역사’. ‘역사의 희망’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압수된 500권은 아직도 실종 중이다.


『책의 공화국에서』는 단지 한 출판인에 의한 출판운동보고서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기획하고 만들어낸 책들은 폭압적 시대의 격랑에 맞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자 했던 책들이다. 책의 윤리를 온몸으로 실천한 전범들이었다. 역사와 시대의 첨단에 섰던 당대 지성들과 나눈 지적 모험과 실천의 과정이 한 권의 책으로 결집되어 독자들 앞에 당도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한 권의 책’이란 시대와 역사와 사상의 반영물인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여 새로운 시대와 역사, 사상을 개진하는 살아 있는 정신 그 자체이다. 그는 책이란 끊임없이 살아서 운동하는 유기체이자 다른 미래를 꿈꾸게 하는 매개물로써 인식한다. 그런 점에서 『책의 공화국에서』는 한 출판인의 출판운동보고서를 넘어 책의 윤리학이자 책의 생태학이라는 보다 높은 관점에서의 독법을 우리들에게 요구한다.





책의 다른 형식들


김언호는 연구실이나 편집실에 갇힌 출판인이 아니다. 그는 편집실에 앉아서 필자가 가져다 줄 원고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필자들의 잠재된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낸다. 그들을 고무 격려하고 앞에서 끌며 뒤에서 밀어댄다. 행동하는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와 단재 신채호처럼 그 역시 행동하는 출판인이다. 1980년대 중반 성북구 안암동 5가 101번지, 작은 출판사옥에서 시작된 다양한 출판문화운동은 그가 유폐된 지식인이 아닌 길 위의 지성, 행동하는 출판인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서울 성북의 안암동 5가 101번지의 자그마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한길역사강좌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한길역사기행, 독자와의 대화, 한길역사강좌와 이런저런 특강 등은 80년대에 우리 출판사가 펼친 출판운동과 더불어 참으로 신나는 문화마당 · 지식마당이었고, 많은 저자와 독자에겐 지금도 강렬한 풍경과 기억으로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434쪽)



그러기에 그가 책 속에서 서술하는 문장들 또한 언제나 ‘현장’과 ‘상황’에서 달구어진 뜨거운 피돌기로 힘차게 자맥질한다. 그는 끊임없이 기획하고, 상상하고, 모험하고, 실천한다. 그 과정에서 책의 외연을 끊임없이 확장한다. ‘한길역사강좌’, ‘한길사회과학강좌’, ‘한길역사기행’,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독자수련회’와 ‘지식인대토론회’ 등 일련의 기획과 실천은 일회성 이벤트나 우연한 행사가 아니었다. 책의 내포를 깊게 하고, 외연을 확대하고자 하는 그의 의식과 신념의 소산이었다. 



▲출판인 김언호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펼쳐졌던 ‘역사기행’은 전국토를 역사의 공동체험, 학습의 장으로 활용했다. 안동의 병산서원과 호남의 동학농민전쟁터, 강진의 다산초당과 남해의 다도해, 선운사와 금산사, 남한강과 섬진강, 정선의 아라리와 진도의 아리랑, 지리산과 경주의 남산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현장들은 국토라는 거대한 책 속의 낱낱의 페이지들이었던 셈이다.


다양한 강좌시리즈와 국토기행을 통해 공유한 느낌과 생각과 견해들을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엮인 책들은 다시 새로운 정신과 미래를 열어가는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는 진실을 『책의 공화국에서』는 섬세하고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언호의 인문적 스팩트럼은 넓고도 깊다. ‘인도를 찾는 사람들’, ‘지중해클럽’과 네팔여행 그리고 헤이리 예술마을은 그가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운동의 전방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말과 글을 아끼고, 이름 없는 농부의 편지와 어린아이의 일기도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그는 재능은 있지만 가난하고 어린 바이올린 연주자를 위해 음악회를 기획하고, 미술전시회를 마련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국의 여행과 우리말과 글, 사소한 편지와 일기, 음악회와 미술전시회는 또 다른 형식의 한 권의 책이며 일종의 축제이다. 





라이프 워크로서의 『책의 공화국에서』


『로마인 이야기』가 시오노 나나미의 라이프 워크이고, 『한국사 이야기』가 이이화의 라이프 워크이며, 『중국인 이야기』가 김명호의 라이프 워크라고 할 때, 『책의 공화국에서』는 김언호의 라이프 워크이다.ㅍ그의 책 만들기 35년 역사는 한길사라는 한 출판사의 사사(社史)이기도 하지만, 지난 7,80년대 엄혹한 시대를 통과해 온 우리 현대사의 고난과 성취를 고스란히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 출판사와 한 출판인의 기록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한 축을 들여다보는 이상한 체험을 한다.


냉전이 해체되고 이념이 몰락한 90년대 이후, 『로마인 이야기』15권, 『한국사』전27권, 『한국사 이야기』전22권과 같은 대형 시리즈 기획으로 급변하는 출판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한 출판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당대의 지적 지형도와 시대정신 또한 명징하게 읽어낼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지속되는 김언호의 ‘아름다운 단 한 권의 책’에 대한 열정과 신념은 윌리엄 모리스라는 아름다운 장인 앞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간다. 역사학자 이광주의 『아름다운 책 이야기』와 윌리엄 모리스의 아름다운 디자인과 ‘출판장인’ 김언호의 정신의 문양은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형용사를 공유한다. 우리는 그들이 지독한 탐미주의의 동지이자 도반임을 알고 있다.


『책의 공화국에서』의 앞과 뒤를 감싸고 있는 첫 글과 마지막 글은 묘하게도 출판인 김언호 이전, 원형질로서의 김언호의 모습을 투명하고 소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글들 속에서 어린 시절의 고향풍경과 부모님의 모습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정겹고 고즈넉하다. 고단한 농사일에 평생을 몸 바치신 부모님 모습에서 김언호는 농사짓는 일과 책 만드는 일이 다르지 않음을 통찰한다. 그는 책 쓰는 사람과 책 만드는 사람과 책 읽는 사람의 수평적인 연대구조 속에서 역사와 시대가 진보하고 새로운 문화가 창출될 것임을 굳게 믿는다. 그의 이러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함석헌 저작집과 관련하여 언급한 그의 말은 매우 아프게 들린다.



“선생님의 제자들이라면서 선생님의 글을 구체적으로 읽지 않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지식인들이나 연구자들도 선생님을 거의 읽지 않고 있음을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51쪽)



위의 말은 단지 함석헌 저작집에만 국한되는 지적은 아닐 것이다. 자칭 책 좀 읽는다고 하는 자들의 느슨하고 나태한 독서행위를 날카롭게 꿰뚫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하다. 하지만 그 울림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김언호는 ‘책머리에 부치는 말’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고맙습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되어  정말 고맙습니다.”(21쪽)



우리가 한 출판인에 대한 예의를 갖춘 독자라면, 그의 인사에 우리가 응답해야할 차례이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좋은 책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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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