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다반사2015.10.14 15:54

2015 파주북소리 소년한길 풍경

 

 

지난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파주출판도시에서 파주북소리 2015가 열렸습니다.

급작스럽게 추워진 데다 비까지 내렸지만 많은 분들께서 찾아주셨습니다.

소년한길은 오치근 선생님, 박은미 선생님과 함께

10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어린이 독자들을 만났습니다.

 

 

10월 9일에는 멀리 하동에서 오치근 선생님께서 파주를 찾아주셨습니다.

지난 5월에는 우리나라의 차 문화 유적과 전통을 알리는 『초록비 내리는 여행』을 펴내시면서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차의 맛과 떡차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요.

 

 

 

이번에도 어린이 독자들을 위해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오셨습니다.

멀리 하동 악양의 지리산 자락 선생님 댁에서부터 가져오신 갖가지 자연물이었습니다.

어른 주먹보다도 큰 대봉감과 보랏빛 열매가 예쁜 구슬처럼 알알이 맺힌 자리공,

그리고 하동 특산물 녹차까지 가을의 정취를 한껏 품고 있었지요.

특히 함초롬한 흰 꽃과 동글동글 열매가 어우러진 녹차 가지가

싱그러운 하동의 가을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박관순 부사장님께서도 노박 덩굴, 찔레 열매, 독활, 상수리 열매, 대추 등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는 나무 열매들을 한아름 선물해 주셨답니다.

 

 

 

어린이 친구들은 다양한 자연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직접 손으로 만져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뒤 선생님과 함께 자연물을 그리고 이름을 지어주거나 자신의 감상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추를 직접 맛본 뒤 신기해하며 ‘대추는 사과 맛이 난다’는 감상을 쓰기도 했지요.

자리공 열매를 으깨 고운 자줏빛을 내기도 하고 찔레 열매로 예쁜 감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등

선생님께서 자리공 열매를 가지고 조그마한 힌트를 주시자 어린이들은 열매와 꽃, 이파리들을 관찰하며

곧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색을 자유로이 활용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기도 했습니다.

 

 

 

커다란 도화지 두 장을 빼곡히 채우자 어느새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작품을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0월 10일은 박은미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흩뿌려서 걱정했는데 많은 어린이들이 선생님을 뵙기 위해 찾아주었답니다.

선생님께서는 얼마 전 정원요정 히스와 친구들의 모험을 그린

신작 『정원요정 히스와 시계탑 속의 딜』을 출간하셨습니다.

 

 

 

 

박은미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에는 책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시계탑을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책 속에서 고양이 딜이 폭풍우에 휩쓸려 날아가 갇혔던 시계탑이지요.

 

모두들 상상력을 발휘해 멋진 시계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색종이를 접어 입체 지붕을 만든 시계탑, 안쪽으로 계단이 연결된 시계탑,

리본과 하트로 장식된 앙증맞은 탑 등 어린이들의 솜씨가 정말 대단했지요.

조금 어린 친구들은 선생님과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모든 친구들이 자신만의 시계탑을 멋지게 완성했습니다.

 

 

 

 

 

 

 

매해 북소리 축제 때마다 많은 사람들께서 찾아주시지만

항상 더 많은 분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어린이들은 평소 좋아하던 그림책 작가 선생님을 직접 만나

저마다의 상상력과 재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었습니다.

소년한길과 오치근 선생님, 박은미 선생님은 독자들과 시간을 보내며

어린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또다시 어린이들과 함께 책 속에 푹 빠져들 날을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소년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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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2015.10.08 17:39

 

 

 

 

『학담평석 아함경』(전 12권, 2014)

파주북어워드 2015 기획상 수상!

 

 

 

파주북어워드 2015 심사위원회 보고

기획상

한길사 기획, 『학담평석 아함경』(전 12권, 2014)

 

"한길사가 기획하고 학담(鶴潭) 스님이 집필한 『학담평석 아함경』을 기획상 수상작으로 정한 이유는 오랜 시간과 훌륭한 기획 및 제작 작업을 거쳐 탄생한 방대한 규모의 역작이라는 점도 있지만, 학담 스님이 아함경을 재해석하며 보여준 초월적인 정신을 발굴하고 구현해냈기 때문입니다. 불교와 그 교리는 동아시아 공동의 정신 자산입니다. 소승불교 경전인 『아함경』은 대승불교가 연기론(緣起論)ㆍ중도론(中道論)을 설파하면서 부처의 참뜻과는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학담 스님은 대승의 견지에서 『아함경』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내놓았으며 대ㆍ소승 간의 논쟁을 뛰어넘어 불교의 회통(會通)과 조화 정신을 현대정치와 사회분쟁 문제에 녹여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학담 스님과 한길사의 성과가 지니는 중요한 의미이자 소중한 가치입니다."

 

 

추천 이유

"『아함경』은 붇다 직후의 초기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 붓다의 사상을 변형 없이 그대로 담고 있는 까닭에 이후 동아시아 종교ㆍ철학ㆍ문예의 공통적인 원천이 된 중요한 문헌이다. 그러나 본래 『아함경』은 원전 분량만 2천여 경이나 되는 접근하기 힘든 책이다. 『학담평석 아함경』은 이 방대한 분량의 경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풀이하고 해석한 공로가 돋보이는 저작이다. 원고 4만 5,000매, 책 페이지 1만 1,000쪽, 전 12권 분량에 연찬 기간 30년, 집필 4년의 노고가 담겨 있다.

이 책은 원전의 난해한 용어와 개념을 쉽고 명석하게 풀이하여 동아시아 공통의 자산을 현대화하려고 노력한 점, 선종과 교종의 이원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통합적 해석을 시도한 점, 불교적인 회통과 화합의 정신을 오늘날의 정치사회적 갈등 상황에 제시한 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표지와 오랜 집필과 편집의 노력을 아낌없이 쏟은 점에서 기획력이 돋보인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좋은 책 만들기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권의 책이 기획될 때마다 갖가지 사연이 있겠지만, 『학담평석 아함경』은 사연도 많고 인연도 긴 책입니다.

한길사와 『아함경』의 인연은 무려 1985 7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5년 여름 한길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고찰(古刹) 해인사(海印寺)에서 저자와 독자와 편집자 30여 명이 참가하는 2 3일의 연찬회(硏鑽會)를 주관했습니다. 그때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학담 스님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연찬회에 참가하고 있던 한길사 김언호 사장은 젊은 학담 스님의 통찰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한길사는 이 특강을 계기로 스님과 교유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길사는 이어 학담 스님이 저간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물러섬과 나아감』을 출간하게 됩니다. 학담 스님은 이미 본격적인 불교 연구서들을 저술ㆍ출간하고 있었습니다. 

『아함경』은 불교의 초기경전으로서, 제자들이 기록한 붇다의 생생한 육성입니다. 붇다의 육성이기에, 사상가 붇다와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전의 분량만 2,000여 경에 달해 그 전체를 이해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경전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다섯 종류의 니카야로, 북방불교에서는 네 종류의 아함으로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학담평석 아함경』은 ‘아함’을 소승불교로 보는 기존의 관점을 극복하고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깊은 해석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아함’을 삼보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책 전체를 ‘귀명장’ ‘불보장’ ‘법보장’ ‘승보장’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 방대한 아함의 세계를 번역하고 평석(評釋)함으로써, 기존의 연구를 뛰어넘고 어려운 불교용어를 한글화하고 현대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방대한 아함의 세계를 경이롭게 체계화시키고 해석해낸 학담 스님께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집필에 30, 편집에만 4년이 걸렸습니다. 스님의 연찬과 더불어 한길사 편집실의 편집 공력이 담긴 기획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한 시대의 출판문화는 독자와 저자와 편집자가 함께 만들어나갑니다. 학담 스님과 한길사의 오랜 교유가 『학담평석 아함경』으로 아름답게 결실을 맺어 이렇게 영광스러운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독자의 독서가 됩니다. 한길사도 이번 수상을 계기로 좋은 책 만들기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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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 한길아트2015.09.04 14:56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투쟁, 마침내 진실을 밝히다!

_신간 『나는 고발한다

 

 

나는 한 정직한 인간으로서

  온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진실을 외칩니다.

  진실은 지하에 묻혀서도 자라납니다.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허위를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에밀 졸라

 

 

수년간의 지난한 투쟁 끝에 소수의 양심세력이 승리한 드레퓌스사건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국가’ 라는 대(大)의 이념에 대항해 개인의 인권과 진실을 지켜낸 장대한 드라마였습니다. 민주주의의 선봉에 서 있다고 믿었던 프랑스에 엄청난 정치적ㆍ사회적ㆍ사상적 혼란을 일으켰지요.

 

19세기 말 평범한 군인이었던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렇다 할 항변의 기회도 없이 비공개 군법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군 수뇌부의 증거 날조, 재판부와 언론의 부실한 조사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무고한 한 사람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은 반유대 언론과 군이 유포한 허위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사회는 국가안보를 기치로 드레퓌스에 대한 단호한 단죄를 주장한 재심반대파와 불공정한 재판을 문제 삼으며 끊임없이 저항한 재심요구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합니다. 전국이 난폭한 이분법의 광기에 사로잡히고, 진실은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근대국가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장대한, 프랑스로 하여금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민주주의의 기반을 전면 재검토하도록 만든 엄청난 드라마가 개막되었던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은 좋다. 틀림없이 고귀한 이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小)를 위해 대(大)가 희생되어야만 할까? 단 한 사람을 위한 도덕적 옹호로 인해 프랑스 모든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아도 좋단 말인가? 이와 같은 문제를 놓고, 이성의 나라 프랑스는 제정신을 잃고 말았다.(28쪽)

 

 

드레퓌스

 에밀 졸라

 

 

졸라는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문필 생활로 이룬 모든 것을 걸고, 진실 규명을 촉구하며 대중에게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이 발표한 이후, 프랑스는 더욱더 격렬한 광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군중이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고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했습니다. 졸라의 기사를 불태우고 졸라의 초상을 목매달았습니다. 파리의 군중은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라는 깃발을 들고 대로를 행진했습니다. 항의 집회가 열리고 유혈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아집에 휩싸인 프랑스는 전 세계의 질타를 받았지만, 쉽사리 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소수를 위협했다. 그러나 소수의 용기 있고 책임 있는 사람들의 저항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였던가? 다수의 편에 서서 소수를 반대하는 일은 항상 쉬웠다. 소수의 반대자들이 기댈 기관들은 없었다. 전 국민이 단결하여 반대하는데, 이 소수의 반대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싸워야 했던 것인가?(379쪽)

 

 

1898년 파리에서 벌어진 군국주의자들의 반드레퓌스 시위

 

 

 

드레퓌스가 기소되고 12년이 지난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는 그에 대한 모든 유죄 판결이 오판이며 무효라고 판시했습니다. 국회는 ‘프랑스의 양심을 해방하는 뜻에서’ 드레퓌스와 피카르를 프랑스 육군으로 복귀시킨다는 동의안을 통과시켰고요. 두 장교는 곧 완전 복권되었고, 프랑스를 뒤흔든 거대한 드라마는 마침내 진실을 추구한 양심세력, 재심요구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니홀라스 할라스 지음, 황의방 옮김, 496쪽, 한길사

 

 

 

나는 고발한다』는 드레퓌스사건을 흥미진진하고 충실하게 서술한 책입니다. 전설이 된 에밀 졸라의 글 「나는 고발한다!」가 저자 할라스의 목소리로 다시 울려 퍼집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다양한 인물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사건이지만 할라스는 명료한 통찰로 우리를 매혹하죠.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이야기와 재치 있는 필치! 배경지식이 없는 그 누구라도 한 편의 역사드라마를 보듯 사건 속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저도 그랬습니다!).

 

드레퓌스사건은 어느덧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신문의 지면을 장식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슬프게도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기만과 혼돈의 사기극이기도 합니다.

혹시 2015년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제2ㆍ제3의 드레퓌스가 양산되고 있지는 않은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들을 구원할 양심적인 지식인, 졸라나 피카르, 클레망소가 우리 사회에도 있나요. 자신과는 관련도 없는 이의 운명 그리고 진실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회와 맞설 진정한 지식인이... 책장을 덮자니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 편집자 映

 

 

 

KBS 뉴스광장 [새로 나온 책] '나는 고발한다' 영상 바로가기

http://media.daum.net/v/20150824074434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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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독서인』에 실린 "本でつくるユートピア" 서평


최근 일본에서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책의 공화국에서』를 번역한

『本でつくるユートピア』(책으로 만드는 유토피아, 기타자와 출판사)가 출간되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서평지 『주간 독서인』에 그 서평이 실렸기에 한국의 독자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립니다.

필자는 일본 학습원여자대학의 비상근 강사인 채성혜 박사입니다.

 

 

 

 

 

『주간 독서인』2015년 6월 5일

 

출판인 김언호의 생각과 실천

한국이 가장 괴로웠던 시대가 엿보인다.

 

채성혜 蔡星慧 

 

 

한국의 출판사 한길사가 40년 가까이 펴내온 출판물을 보면, 한국사회가 고통스러웠던 시대의 역사가 엿보인다. 이 책은 김언호 씨가 1976년 한길사를 세웠을 때부터 한국의 지성과 사상과 역사를 넓혀온, 투쟁하는 출판인으로서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0~80년대의 한국사회는 군사정권에 의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가 점점 확대되었던 암흑의 시대였다. 김언호 씨는 그런 억압의 시대와 조우할 때마다 책 만드는 것으로 싸워왔다. 기자로서 활동하던 동아일보를 나와, 한길사를 창립하고부터 일관되게 지켜온 것은 지성과 이성을 꿈꾸는, 현인들의 성찰과 실천을 기록하는 것이다.

 

김언호 씨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의식한 것은, 한 권의 책이 인간을 생각하고, 국가와 사회, 민족의 문제를 생각하고 인류와 세계의 문제에 대해 담론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와 권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출국금지, 출판물의 판매금지, 경영정지 처분 등의 역경을 거치면서도, 판금된 출판물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뛰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민족은 무엇인가, 역사는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면서, 지성의 거장들(석학)과 만나 의논하고 책을 만들어왔다. 또한 집필자나 독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출판사를 오픈하여 집회를 열고, 수도 없이 많은 역사강좌와 역사기행, 사상을 논하는 장을 열었다. 그 장을 통해 많은 지식인, 연구자들이 자극을 받았고, 한국사회에 그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출판물은 한길사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세상에 닿을 수 있었다. 그 궤적은 다 헤아릴 수도 없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190여 권을 간행해온 ‘오늘의 사상신서’는 대표적인 기획출판물이다. 사상가인 『함석헌 전집』20권, 진보적 지식인의 고난의 생애를 상징하는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 전쟁과 인간의 욕망을 고발하는 홋타 요시에의 『고야』, 한길사가 직접 기획해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에 걸쳐 간행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 등 사상과 역사를 묻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특히, 역사에의 성찰은 한길사에서 가장 힘을 쏟는 부분으로, 1986년부터 1994년까지 8년간 170여 명이 참가한 ‘민찬’ 『한국사』전 27권은 그 큰 성과일 것이다.

 

번역자인 다테노 아키라 씨는 김언호 씨가 가장 신뢰하는 한길사의 오랜 벗으로, 오랜 세월 한길사를 응원해왔다. 한국이 IMF경제위기로 도산의 위기였던 시대에 퇴직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많은 독자들에게 읽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위해, 김언호 씨와 로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언호 씨가 책을 만드는 생각의 기반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고향의 부모님이 존재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주시고, 항상 아이들의 판단을 믿어주신 양친으로부터 배운 것은 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그런 부모님이 열심히 농업에 매진해온 생각은, 책을 만드는 데 매진하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출판인으로서 출판계를 걸어온 족적도 크게 남아 있다. 한국 출판인회의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국ㆍ중국ㆍ일본 인문서 출판사의 뜻있는 네트워크인 ‘동아시아 출판인회의’의 대표도 역임했다. 파주출판도시의 북쪽에 위치한 헤이리 예술마을을 구상하고 건설했다. 헤이리에는 북하우스와 한길책박물관을 지었다. 여러 문화이벤트를 개최, 많은 출판인이 정열을 쏟아 기획하고, 아름답게 디자인된 책을, 시공을 초월하는 현인이나 석학의 정신과 사상을 공유하기 위한 장이다.

 

2016년에 한길사는 창립40주년을 맞는다. 한길사의 책만들기는 한국사회 지성의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회사 이름의 ‘한길’은 한국어로 큰 길, 바른 길, 광장을 의미한다. 지성과 이성, 이론과 사상, 정신과 감성이 골고루 모여 논하는 열려있는 공간이다. 한 독자로서 김언호씨의 이런 책만들기의 정신과 사상은 앞으로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해 한국의 지성을 자극해나가주었으면 하고 신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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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다섯 번째 이야기
인간들의 운명, 인간들의 역사
중국인과 한국인, 한국인과 중국인

 


                                                                                                                                                                                                                       이용석(성바오로병원 근무)

 

 

  지금 중국에는 한국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환자가 한국에서 걸러지지 못하고 홍콩을 경유하여 중국에서 격리조치 받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이를 보고 ‘까오리빵즈’(高麗棒子, 몽둥이찜질해도 시원찮을 고려얼간이들이란 뜻으로 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말)라고 하며 반(反)한류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한국 SNS 및 포털에서 실시간 검색어 최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이런 반한(反韓) 상황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한국의 무능한 검역시스템은 나중에 논하는 것으로 하고 만약 오늘날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숨쉬고 생활하는 터전인 신중국 건설에 우리 선조들이 크게 일조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렇게 극한 감정으로 한국을 비난할 수 있을까? 요즘 젊은 한국인들도 잘 모르고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한ㆍ중 공조의 중국현대사를 안다면 이렇게까지 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뿌리는 같다. 양당의 대결은 황푸군관학교 출신들끼리의 싸움이었다."

 <중국인 이야기 4> , 91쪽

 

중국과 한국, 그 오랜 역사적 인연
  20세기 중국 현대사는 황푸군관학교(육군군관학교가 정식명이지만 지역이름을 본떠 황푸군관학교라고 불렀다) 출신들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장을 지낸 장제스(국민당, 전 타이완 총통)와 정치부 주임 저우언라이(중공 총리)를 비롯해 쉬샹첸(중공 국방부장), 예젠잉(중공 육군원수), 천겅(6.25전쟁 참전군 부사령관 역임), 다이리(국민당 조사통계국장, 장제스의 오른팔), 후쭝난(국민당 총참모장) 등 중국과 대만을 움직인 거물들이 이곳에서 같이 생활하며 이념은 달랐지만 조국의 개혁과 해방을 꿈꾸며 같은 꿈을 키웠다. 그리고 거기에 조선 사람들이 있었다.

 

 

황푸군관학교

 

 


대한민국독립을 위해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가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황푸군관학교가 개교하자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총리 신규식은 쑨원(황푸군관학교 설립자 및 신중국의 국부)을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조선인 학생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줄 것을 협의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도 조선인의 입학을 요청해 조선 학생 73명이 입교한다.
이때 입학했던 조선인 학생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양림, 이범석, 최용건 등이 있다. 양림은 윈난 쿤밍에 있는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황푸군관학교의 교관을 지냈다. 이후 1932년에 만주의용군을 조직했으며 홍군 23군 군단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이범석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전투를 치른 후 만주를 떠나 윈난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이후 후쭝난의 지도하에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해방 후 귀국해 대한민국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최용건은 윈난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1928년 만주 헤이룽장 성 통화 현에서 반일폭동을 일으킨다. 이후에 김일성처럼 동북항일연군에서 7군 참모장을 지내고 해방 후 귀국해 북한에서 국가 부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그 외에도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본명 장지락), 김성숙(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 장건상(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원 등의 조선인들이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부는 1927년 7월 중국인 예팅, 허룽, 예젠잉 등 훗날 중공의 주축들과 연합해 난창기의를 일으키고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해방을 꿈꾸며 중국의 항일전쟁과 신중국건설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맹활약한 인물도 부지기수였다. 더불어 조선인 교관 밑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의 많은 엘리트가 지금의 신중국을 건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너무나 닮아 있는 두 제국의 몰락
  특히 <중국인 이야기 4>의 ‘무너지는 제국’(193쪽)을 읽는 내내 청말 황실의 몰락과 대한제국 황실의 몰락이 머릿속에서 계속 교차되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아이신줴뤄 푸이는 군벌에 의해 자금성에서 쫓겨나고 일제에 의해 만주국 황제로 취임하여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하다가 1945년 일제의 패망 및 1949년 신중국 건설이 이루어지면서 전범자로 수감생활을 한다. 풀려난 후에는 문화대혁명 시기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생을 마감한다. 나는 문득 대한제국의 영친왕이 떠올랐다. 황실의 몰락과 함께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었고 일제의 정책에 의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 육군에 임관하여 전장을 돌아다니다 조선 사람이 아닌 일본인 여인 마사코(한국명 이방자 여사, 대한제국 영친왕비)와 정략결혼을 한다. 1945년 광복 후 영친왕을 견제한 이승만의 방해로 그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1963년 혼수상태로 영구 귀국하여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한다.
  푸이의 효각민황후 완룽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말년에 아편에 취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1935년 만주국 시절 완룽은 일본군관 사이에서 사생아를 출생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푸이는 황후가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 버렸고, 완룽은 출산한 아이를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고 양육비를 건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를 보니 나는 또 대한제국의 황녀 덕혜옹주가 떠올랐다. 경성일출심상소학교에 재학 중에 일본의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여자학습원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에 옛 대마도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여 1932년에 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1930년에 조울증, 우울증과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증 증세를 보였으며 결혼 이후에는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 이혼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 거주하다 1989년 사망하였다. 딸 소 마사에는 어머니와의 불화로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두 제국의 중심인물들의 최후가 어쩌면 이리도 비슷할까? 묘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왜 그럴까? 나는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묘하게도 중국인 인물들에 한국인 인물들이 오버랩된다. 한 인간의 운명은 또 다른 인간의 운명일 수 있을까? 인간들의 유형은 비슷한 듯 다른 것일까?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인물과 사건을 통해 보는 중국사이면서 보편적 인간 극장 같기만 하다. 다음 편에는 또 어떤 인물들이 나올까? 5권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용석(성바오로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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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네 번째 이야기
<중국인이야기>와 나의 중국문화여행
<중국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넘어갈수록
그들이 밟고 있던 역사 속으로 물밀듯이 나아가고 싶어진다
 
                                                최종명 (문화평론가, 중국여행전문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중국인 이야기> 1, 2, 3권만큼이나 4권을 읽으면 중국 방방곡곡을 땀내 닦으며 걷던 기억들로 설렌다. 장쉐량의 고향 선양의 장솨이푸와 ‘시안사변’의 총탄 자국, 그의 첫 연금 현장이자 장제스의 고향 시커우의 미륵보살 성지, 대장정의 종착지 옌안의 동굴 집 야오둥, 베이징 후퉁에 있는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의 고거, 마지막 황제 푸이의 창춘 위만황궁박물관, 동북항일연군의 만주 벌판까지 중국사의 주요 장면이 옴니버스로 엮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책 속에 담긴 ‘중국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넘어갈수록 그들이 밟고 있던 역사 속으로 물밀 듯이 나아가고 싶어진다. 나의 중국문화답사기의 단골 메뉴이기도 한 장쉐량과 푸이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이니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쉐더우산 연금 장소에 있는 장쉐량과 자오이디 조각상.


폭포 같은 사랑, 쑹메이링과 장쉐량
쑹메이링과 장쉐량의 인연은 제1부 ‘풀리지 않는 삼각관계’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들의 정분이 ‘만리장성’을 쌓을 정도로 깊었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시안사변 이후 53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시안사변 한 달 후 황푸군관학교 출신 국민당 특무 다이리의 호송을 따라 ‘제일유금지’(第一幽禁地) 쉐더우산에 온 장쉐량은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낙차 171m의 천장암 폭포를 즐겨 찾았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장쉐량에게 감정이입을 하노라면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권력핵심의 정치인이 토해냈을 사자후가 들리는 듯도 하다.
 
쉐더우산에는 늠름한 청년 장군 장쉐량 조각상과 함께 연금생활 도중 단 3일도 곁을 떠난 일 없던 자오이디 여사의 백옥 같은 조각상도 자리를 잡고 있다. 1960년대 쑹메이링은 해금을 도울 목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한다. 처와 첩을 둔 장쉐량은 일부일처 제도와 해금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미국에 있는 본처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본처 위펑즈는 장쉐량과 자오이디의 “순수한 사랑을 믿으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이혼에 동의한다. 장쉐량은 기독교에 귀의했지만, 장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아들이자 총통이 된 장징궈에게 ‘절대 불가’를 유언하기도 했다. 72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결같았던 자오이디는 2000년, 장쉐량은 103세의 나이로 2001년 나란히 숨을 거두고 합장됐다. 장쉐량을 평생 살펴준 쑹메이링도 2003년 천수를 누리고 그들 곁으로 떠났다.

 

 

 

위만황궁박물관에서 본 황제 즉위 시절과 수감 후 재판 장면.

 


무너지는 제국, 비운의 황제 푸이
장쉐량만큼 삶의 우여곡절이 깊던 인물은 마지막 황제 푸이다. 제3부 ‘무너지는 제국’에서 푸이는 수감 중에 자신의 네 번째 부인 리위친에 의해 이혼당하는 황제라는 오명을 얻는다. 진시황 이래 어느 황제에게도 이혼이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푸이는 여전히 황제 대우를 받던 시기에도 이혼당한 전례가 있다. 황후와 황비를 동시에 얻어 결혼한 푸이는 퇴위 후 1931년 8월 ‘마지막 황비’ 원슈로부터 이혼선언을 당한다. 이를 역사에서 ‘도비혁명’(刀妃革命)이라 부르는데 황제 푸이의 엄청난 충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혼에 이르게 된 까닭을 황후 완룽의 시기와 질투 때문으로 여긴 푸이는 크게 상심했다. 완룽은 허울뿐인 황후로 전락했고 우울증에 시달려 아편에 집착했으며 시위와의 불륜으로 임신까지 했으니 황실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푸이는 만주족 출신의 탄위링과 결혼해 그녀의 사진 뒷면에 ‘내가 가장 사랑한 탄위링’이라 손수 쓸 정도로 다정했지만 5년 만에 의문의 병사를 했다. 그리고 책에서 자세히 언급한 리위친과 결혼하게 되지만 1957년에 다시 이혼 소송으로 둘 사이의 관계도 끝나고 만다.
 
창춘의 위만황궁박물관에는 '황제에서 평민까지'라는 푸이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 있다. 그의 일생은 화려했지만 불우했고, 처량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말년을 보냈다. 체포 후 곧 죽을 목숨이라 생각했던 그는 15년의 수감 생활 동안 수많은 반성과 신중국 지지 선언을 거쳐 감옥으로부터 풀려난 후 마지막 부인 리수셴과 결혼한다.
 
둘 사이는 아주 금슬이 좋았지만, 푸이는 문화혁명 초기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1967년에 결국 신장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사망 후 유해는 베이징 인근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됐다가 1995년 청나라 서쪽 황릉 부근 사설 묘원인 화룽능원에 이장된다. 3살에 황제가 되었지만, 자금성에서 쫓겨난 황제라는 숙명 때문에 청나라 황실 능원인 동릉과 서릉 어디에도 안치되지 못했다.

마지막 황릉은 선통제 푸이가 아닌 광서제의 몫이었다. 청나라는 재정문제로 갈수록 황릉의 규모가 축소됐는데도 광서제의 숭릉은 화려하고 거대하다. 숭릉에 서면 푸이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숭릉 뒤쪽 200m 지점에 잠들어 있는 푸이야말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20세기 <중국인 이야기>의 한 장면이니 말이다.
 
천일야화보다 더 긴 차이니즈 나이트를 기다린다
김명호 저자의 <중국인이야기>를 4권까지 읽으면서 늘 ‘중국문화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중국판 ‘아라비안나이트’를 밤을 새워 읽어야 하듯 우리는 ‘중국’을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살피듯 정치와 경제도 제대로 파악해야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나라와 선의의 경쟁과 우호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신드바드’가 모험을 떠났음직한 파키스탄의 항구 과다르는 중국이 40년 운영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신실크로드로 질주하는 중국을 이해하는 코드로 <중국인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천일야화보다 더 기나긴 ‘차이니즈 나이트’가 또 기다려진다.

 

 

 최종명

문화평론가, 중국여행전문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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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다반사2015.06.04 14:25

역사학의 거장들 역사를 말하다

제1강 역사학과 인류학의 만남 『기적을 행하는 왕』

6월 3일 정동프란치스코회관

 

 

마르크 블로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왜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걸 쉽게 믿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 통에 얼마나 많은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을까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본인의 관심사인 유럽 중세시대를 다룬 첫 번째 저서가 바로 『기적을 행하는 왕』입니다.

1000여 년 전 프랑스와 영국에서 일어난 ‘기적의 역사’와 ‘기적을 믿는 역사’.

한길그레이트북스 134권『기적을 행하는 왕』을 번역한 박용진 선생님이 전하는

‘역사학과 인류학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마르크 블로크는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프랑스 아날학파 1세대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아날학파는 문헌연구나 역사적 사건 자체에 집중한 기존 역사연구와 달리, 역사에 대한 구조적 파악을 위해 새로운 연구방법을 도입하며 20세기 역사학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특히 2세대인 페르낭 브로델에 와서 그 영향력이 커졌는데요, 브로델은 “모든 인간과학은 사회의 전체성에 이르는 하나의 문이다”라며 전체사를 강조했습니다. 또, 역사학과 사회과학(지리학)의 결합, ‘시간지속’ 개념으로 역사연구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마르크 블로크 뤼시앵 페브르

 

 

 

 

인류학적 역사학의 첫걸음

 

"그리스도가 과연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다시 부활했는가를 아는 것은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문제는 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처형과 부활을 믿는가 하는 점이다."

•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집단 심성을 주제로 삼아 문헌(회계장부, 의학서적)과 비문헌(이미지, 표상)을 사료로 다룬 블로크의 역사방법론은 그 당시 역사연구에서는 새롭고 낯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행동양식, 관습을 다루는 인류학적 역사학은 1980년이 되어서야 일반적인 흐름이 되었는데, 『기적을 행하는 왕』은 50여 년을 앞선 선구적인 저서였고, 그래서인지 출간되었을 때 주목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적의 역사와 기적을 믿는 역사

 

“왕이 너를 만지고, 신이 너를 치료하노라.”

 

블로크는 어떻게 손대기 치료가 행해지며, 이 능력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또 이러한 능력과 행위가 정치적 권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먼저 살핍니다. 이 과정에서 기적을 행하는 왕에 영향을 준 게르만적 요소(왕의 초자연적 능력), 기독교적 요소(도유식), 로마적 요소(대관식)에 주목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이 기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어떻게 해서 기적을 믿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해서 믿지 않게 되었는지를 추적합니다. 당시 왕이 치료한다고 알려진 연주창은 결핵의 일종으로 건강이 회복되면 자연적으로 치료되기도 하는 병이었다고 합니다. 연주창을 앓고 있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왕 앞에 나아가 손대기 치료를 받습니다. 치료가 끝나면 은화와 앞으로 지켜야 할 생활수칙이 적힌 처방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중 몇몇은 건강이 회복돼 연주창이 자연적으로 나았을 수 있습니다. 소문은 금방 퍼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더 강하게 왕의 치료 능력을 믿게 되었겠지요. 치료되지 않은 경우는 환자의 잘못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처방전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결국 “기적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 것은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프랑스 앙리 2세(1547~50) 영국 메리 여왕(16세기)

 

 

 

 

유럽사를 관통하는 성(聖) VS 속(俗)

 

그러나 이러한 믿음도 이성의 세기 앞에서 점점 힘을 잃고 사라집니다. 공식적으로는 19세기 초에 마지막 치료가 있었는데, 민간에서는 20세기 초까지 믿음이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블로크는 왕권의 초자연적 성격이 점차 쇠퇴하는 과정에서 근대의 이성이 승리하는 역사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유럽사를 관통해온 성(聖)과 속(俗)의 대립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프랑스에서 교권과 속권의 관계설정이 첨예한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블로크에게 성과 속의 관계는 지나가버린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다음 강의에서는 마르크 블로크의 주저 『봉건사회』를 다룹니다.

제도가 아닌 인간의 관계에 주목한 역사학이란 무엇일까요.

6월 10일 수요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7시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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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세 번째 이야기

혁명가의 요람 황푸군관학교와 서북왕 후쭝난
“혁명은 청년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키가 혁명과 무슨 상관이냐.”
 
                                                                                          

          최창근(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저자)

                                                                                                    


 

 

 

 

청년 시절의 후쭝난. 1927년 봄 항저우.

 

 

대한광복군에 도움 준 후쭝난
지난 5월 28일, 네 번째를 맞이하는 ‘차이니즈나이트’에서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사변, 혁명가의 요람 황푸군관학교,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와 주변 인물들, 북ㆍ중 관계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였다. 그중 내가 가장 관심 있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황푸군관학교를 둘러싼 이야기와 <중국인 이야기 4>의 제2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선생님이 “사관학교의 경우, 후배는 있어도 선배는 없는 1기생 중에 걸물이 많다. 황푸군관학교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표현했듯 1기의 걸물 등 중 ‘서북왕 후쭝난’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

후쭝난은 내 오랜 관심분야인 한ㆍ중 관계, 한국-타이완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잃고 중국 대륙을 정처 없이 방황하던 시절,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이후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였다. 윤봉길의 의거에 큰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을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대한광복군 설립과 훈련에 도움을 준 일이다. 당시 대한광복군 훈련의 책임을 맡은 이가 바로 황푸군관학교 1기 엘리트였던 후쭝난이다. 훗날 대한민국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99년 광복절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대신하여 아들 후웨이전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여 대신 수상하기도 하였다.

 

 

황푸군관학교의 명성을 이어가는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내가 역사 기록에서 접했던 이름 후쭝난과의 인연은 유학 간 타이완에서도 이어졌다. 내가 타이완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한 학교는 국립정치대학이다. 이 대학은 1927년 중국 난징에서 설립된 중국국민당중앙당무학교를 모체로 한다. 황푸군관학교라 부르는 중국국민당중앙군관학교가 ‘무관’양성의 요람이었다면, 내 모교는 ‘문관’양성을 위한 학교다. 두 학교의 첫 교장이 모두 장제스며, ‘친애정성’(親愛情誠)이라는 교훈도 공유하고 있다. 이 학교가 본디 ‘국민당 학교’임을 보여주는 것은 건물들의 이름이다. 중앙도서관의 이름은 장제스의 본명에서 유래한 중정도서관이며, 이셴이 본명인 쑨원, 장제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다이지타오, 한때 국민당을 좌지우지했던 천커푸 등 중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름을 딴 건물들이 있다. 이런 인연을 가진 곳에서 공부한 내게 자연스레 국민당, 장제스, 황푸군관학교는 익숙한 존재다.

국립정치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 교수를 알게 되었다. 후웨이전은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이 된 아버지와는 달리 국립정치대학 외교학과를 졸업 후 직업 외교관이 되어 ‘총성 없는 전쟁터’로 불리는 외교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타이완 외교부 정보사장(국장), 예빈사장(의전장), 주싱가포르 대표, 주독일대표 등을 거쳤고, 안보 분야에서도 활약, 국가안전국 부국장을 거쳐 타이완 국가안전회의(NSC) 비서장으로서 외교 안보 정책을 총괄하였다.
후웨이전은 외교관 생활과 병행하여 모교이기도 한 국립정치대학 외교학과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한국과의 오랜 인연을 소중히 여겼고, 한국 학생들에게도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그의 호의를 받은 학생 중에는 한때 나와 특별한 관계였던 한 여학생도 있었다. 그녀를 통해 후쭝난-후웨이전 부자와 한국과의 인연에 대해 좀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고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통해 후쭝난-후웨이전 부자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중정도서관

 

시골 노총각 교사 후쭝난, 키 작아 시험에 떨어질 뻔
<중국인 이야기 4>에는 장제스가 가장 신임했던 황푸 1기생 후쭝난이 등장한다. 요즈음 나이로는 40세 정도라 할 수 있는 29세라는 나이, 160cm도 채 되지 않는 왜소한 체격의 시골 노총각 교사 후쭝난! 그는 ‘엉터리 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청운을 좆아 황푸로 향한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 때문에 탈락 위기에 처한다. “근본적으로 군인 자격이 없다. 응시 자격이 없다”는 감독관의 말에 후쭝난은 한 마디로 일갈한다.

 

“나를 국민혁명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이유를 대라. 혁명은 청년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키가 혁명과 무슨 상관이냐. 나폴레옹은 나보다 키가 작았다. 쑨원 선생도 168cm밖에 안 된다. 당 대표 랴오중카이 선생도 나만큼 작다. 쑨원 선생의 주장이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너 같은 것들이 나라에 보답하려는 열혈청년들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중국인 이야기 4> 130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듯 방에서 후쭝난의 항변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그에게 외쳤다.

 

“대표 자격으로 너의 응시 자격을 비준한다.”
<중국인 이야기 4>  130쪽

 

그 사람은 바로 ‘당 대표’ 랴오중카이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황푸군관학교 1기생’ 대열에 당당히 합류한 후쭝난. 그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비록 체격은 왜소하고, 동기생들에 비해 나이도 많았지만 군인으로서 우수한 능력을 증명하였고, 이는 곧 교장 장제스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장제스의 동향인(同鄕人)이기도 했다. 황푸군관학교 졸업 후 후쭝난은 장제스의 신임과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승승장구하였다. 동기생 중 가장 먼저 ‘4성 장군’이 된 것도 그였다.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
그러나 제2차 국ㆍ공내전 시기 그는 공산군에 무려 50만 명의 대군을 전멸당하는 뼈아픈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우연인지 실책인지 고의인지를 두고 말이 많았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민당 내 공산당 간첩 슝샹후이의 모종의 활약이 있었지만, 후쭝난에 드리워진 의혹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1949년 국민당 정부의 타이완 천도 후인 1950년 후쭝난은 감찰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하고 패전에 대한 책임 조사를 받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죄 처분을 받았지만, 한때 ‘서북왕’이라 불리며 장제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영광의 시절은 끝이 났다. 교장 장제스는 더 이상 그를 신임하지 않았고, 한직을 전전하던 그는 1962년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는 조문조차 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후에도 인구에 회자되었다.
<중국인 이야기 4>에서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에 대한 여러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한다.

 

“후쭝난은 국민당군에 잠입한 공산당의 간첩이었다. 국ㆍ공내전이 한창일 무렵 가장 강력했던 중앙군을 지휘한 서북의 왕이었지만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간첩이 아니었다면 신무기로 무장한 50만 병력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와해된 이유가 뭔지 이해할 방법이 없다.”
<중국인 이야기 4> 137쪽

 

근래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을 본격 제기한 인물은 <대륙의 딸들>로 잘 알려진 장룽과 그녀의 영국인 남편 존 핼러데이다. 한국에는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로 번역ㆍ출간된 책에서 두 사람은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슝샹후이와 더불어 그의 상관 후쭝난이 국민당 내 공산당 간첩의 수괴라 주장한다. 이 책은 영문판 출간 후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는데, 문제는 타이완에서 생겼다. 타이완의 모 대형출판사가 책의 번역 판권을 산 후 상당한 계약금을 지급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약금을 지불하고 출간 계획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사건의 배후로 타이완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이 지목되었다. 후웨이전은 자신의 아버지를 공산당 간첩으로 지목한 이 책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당사자들이 공식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에 물증은 없다. 그럼에도 타이완에서 출간이 무산된 것은 후웨이전의 압력이 작용한 탓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중국인 이야기 4>에서도 김명호 선생님은 ‘후쭝난 공산당 간첩설’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후쭝난과 ‘공산당 배후공작의 귀재’이자 ‘마오쩌둥의 장자방’저우언라이와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말이다.

 

“국민당 장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지휘관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후쭝난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시절 후쭝난은 정말 탐나는 인재였다. 공산당 입당은 거부했지만 내가 지도하던 연극반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왔다. 연기력도 뛰어났다. 나는 학생들 중에 공산당원의 명단을 제출하라는 장제스의 요구를 거부했다. 좌파 학생들에게 철퇴를 가하자 황푸를 떠났다. 장제스의 눈치를 보느라 배웅 나온 학생들이 좌우를 통틀어 한 명도 없었다. 내가 탄 쪽배가 섬과 육지의 절반쯤 왔을 무렵 부두에 헐레벌떡 달려와 손을 흔드는 생도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후쭝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어댔다. 연신 눈물 닦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중국인 이야기 4>  136쪽

 

 (저우언라이는) 이런 말도 남겼다.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국민당 고관도 한 사람 있다.”
<중국인 이야기 4>  137쪽

 

저우언라이가 지칭한 ‘국민당 고관’을 두고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다. 후쭝난은 이미 이야기한 대로 황푸 최초의 4성 장군이자 장제스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후쭝난이 국민당 내 공산당 간첩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김명호 선생님도 <중국인 이야기 4>에서 생각의 여지를 남기며 독자들의 애를 태운다.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궁금하지? 그러면 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봐요.” 그래서 <중국인 이야기> 제5권이 더 기대되는지도 모르겠다.

 

최창근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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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두 번째 이야기

 

중국인 이야기, 여적(餘滴)으로 쓴 역사

 

엇갈리는 운명의 드라마,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비공식 중국인명백과사전”이다.

 

권영숙(서양사학 전공/성광 컨설팅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본부장)

 

 

왼쪽은 <역사>를 저술한 헤로도토스, 오른쪽은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저술한 투키디데스.

 

  

 

 이야기라는 것, 역사라는 것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사실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사실이 말하게 한다"는 전제 하에 역사가의 주관을 배제하고 자신이 목격한 것과 들은 증언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견해라고 여겨지는 것들만을 기록하는 투키디데스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로서의 역사로, 자기가 목격한 것만 아니라 들은 풍문ㆍ신화ㆍ전설ㆍ지리ㆍ날씨 등을 폭넓게 전달한 헤로도토스적 전통이다.

  

  투키디데스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기술에는 잡다한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서문에서 자신이 쓰는 역사가 “대중의 찬사를 받고자 쓰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지식의 보고로 남기 위해 이루어진 사실의 집적이다”라고 표명했다. 또한 그는 역사를 국제적 상황이라는 정치적 현실관계 속에서 분석하려 했고, 우연ㆍ도덕ㆍ이념 등 인간적 요소로부터 발생되는 것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헤로도토스는 역사가 인간사를 다룬 이야기고 그 인간사는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페르시아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쾌히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 원인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실을, 사람들의 믿음을, 소문을 모두 나열해서 전쟁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투키디데스가 역사가들의 역사가였다면, 헤로도토스는 대중들의 역사가, 일종의 저널리스트였다. 이 두 전통은 본 것과 들은 것, 사실과 이야기, 사건과 사람, 인과관계와 우연, 기록과 교훈 등으로 대비되며, 역사 서술의 긴 줄기를 이어 왔다.

 


  랑케의 ‘실증사학’ 이후 학문의 한 분과 과목이 되어버린 역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은 투키디데스가 지적한 것처럼 낭만적이며, 공상적이고, 때론 일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역사가 집단 내부에서도 내러티브가 빠진 투키디데스적 역사서술이 역사의 영역을 한정시켜 버렸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들은 역사서술의 객관성을 의문시하고, 역사를 역사가의 해석의 영역에 놓으며, 미세한 이야기들이 거대 역사에 미친 영향을 중시한다. 바로 역사해석에서 ‘여담’이 갖는 유용성이 제기되었다.

 

  유쾌한 이야기꾼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유쾌한 이야기꾼이었던 헤로도토스를 떠올렸다. 이 책은 중국사의 여적(餘滴: 붓 끝에 남은 먹물이란 말로 쓰고 남은 이야기를 뜻한다)으로 가득 찼다. 그렇다면 사건의 인과관계를 사람들의 관계로 치환하며, 지도자들의 내밀한 생활과 뜬소문까지 담은 이 책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김명호 교수는 중국사를 직접적으로 혹은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이야기꾼처럼 사건과 사람에 얽힌 온갖 자료와 에피소드를 함께 전해줌으로써 독자나 연구자들에게 현대 중국의 모습을 바라보는 겹눈을 제공한다. 정치 경제적 구조를 우선시하는 꽉 짜인 인과관계의 역사에 상상력을 부여하고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바로 헤로도토스가 한 방법이다. 이런 서술은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하나의 사건엔 수많은 사람이 덩굴처럼 엮이고, 또 한 사람의 생로병사를 따라서 수많은 인간관계가 파생한다. 이러한 폭넓은 구조의 패턴은 읽는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다각도로 바라보게 해준다. 실제로 각 권의 이야기들은 같은 사건이 상반되어 보이게 서술된 것도 있다. 그 조각그림을 맞추어보면서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다.

 

 

 

 

 

  곡절 많은 사연, 활개 치는 우연

  <중국인 이야기 4>는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의 구금, 이른바 시안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국공합작의 산실 황푸군관학교, 마지막 황제 푸이의 마지막 행로, 신중국 건설 시의 북한의 중국공산당 원조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지만 김명호 교수는 역시 이 사건들을 이념이나 정치 상황으로 채우지 않고 등장인물들 간의 곡절 많은 사연으로 꽉 채운다.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역사에는 반드시 내러티브가 수반되고 또 교훈이 뒤따르며, 필연보다는 우연이 활개 친다. 그래서 이야기는 예측불가능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 인간사의 얽히고설킨 사연이 거대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시안사변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이미 역사적 팩트를 알고 있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을 일으켜 장제스를 구금한 장쉐량은 그로부터 내전중지와 항일전선을 위한 2차 국공합작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를 풀어줬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군사법정에 섰다. 국공합작의 지휘탑으로 다시 복권한 장제스는 돌아와 장쉐량을 구금해 그 후 50년간 연금한다. 이처럼 다 알고 있는 팩트들 사이에 발생하는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저자는 쑹메이링이란 정치력이 뛰어난 희대의 여인을 집어넣는다. 이 여인과 장제스와 장쉐량 간의 삼각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었던 상황을 모면시켰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시안사변 이전에 발생한 군벌대란 때 장쉐량이 장제스를 지지해 그의 중국 통일을 도운 것도 쑹메이링에게 받은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25세의 기혼인 장쉐량과 28세의 미혼인 쑹메이링과의 8일간의 만남은 강렬한 사랑의 의식(儀式)으로 남아, 생의 고비마다 살아 움직였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인간은 별것도 아닌 인연을 필연으로 만들 줄 아는 동물이다. 근 한 세기에 걸친 장쉐량과 쑹메이링의 인연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29쪽

 

  ‘신의 한 수’ 시안사변

  역사를 추동하는 인간의 힘을 믿는 역사가는 인간의 의지가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이 ‘신의 한 수’라 부르는 시안사변에 대해서도 저자는 중국인들의 민심이 내전보다는 항일에 기울었고 이에 공감한 장쉐량이 저우언라이와 접촉하고 구국의 쿠데타를 일으켰다면서, 장쉐량의 영웅적 결단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당시 국제 상황을 읽는 이들은 시안사변을 소련의 저우언라이를 통한 조정으로 읽는다. 그렇다면 누가 장제스를 살리고 누가 장쉐량을 죽음에서 구했던가? 과연 쑹메이링을 과부로 만들지 않겠다는 장쉐량의 결심이 장제스를 살렸는가? 관련 서술을 보자.

 

“1936년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사변이 발생하자 이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중국의 내전을 우려했다.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장제스가 죽기라도 한다면 중국은 내전에 휩싸일 것이다. 중국이 일본과 전면전에 돌입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소ㆍ만 국경을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국인 이야기> 제1권 197쪽

 

“내가 지금껏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쑹메이링의 보살핌 덕분이다. 나는 장제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사람은 나를 죽이려 했다. 나도 한동안은 잘 몰랐다. 존슨(Nelson Trusler Johnson: 1921~41년까지, 주중 미국대사 역임)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39쪽

 

“장제스 총살설 등이 연일 신문 지면을 도배했지만, 장쉐량은 저우언라이의 중재 아래 장제스를 풀어줬다. 장쉐량은 말년의 육성회고록-사후 공개된 1990~93년에 행해진 콜롬비아대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그(장제스)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풀어줬다’면서 그 생각은 변함없다고 회고했다. 시안사변을 중재한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인물이다. (내가) 살해되지 않은 것은 그의 덕택’이라며 감사했다.”

<조선일보>, ‘장쉐량이 말하는 시안사변 진상’, 2002년 6월 7일자

 

  바로 위의 두 진술은 장쉐량이 해금된 1990년, 즉 같은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하나는 소련과 저우언라이로 대변되는 상황을, 다른 하나는 쑹메이링과 장쉐량의 사랑이라는 인간적 요소를 생존 원인으로 들고 있다. 이런 외견상 상충되는 이야기도 50년이라는 긴 연금 기간을 생각해보면 상호 보완적 설명으로 읽을 수 있다. 장제스의 감정이 격해진 순간순간에 쑹메이링이 한 역할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연합에 성공한 후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위원장 장제스(앞줄 오른쪽)와 함께 난징의 쑨원 묘소를 참배한 장쉐량(앞줄 왼쪽). 1930년대 초반으로 추정.

 

 

  엇갈리는 운명의 드라마

  우리는 또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짧은 밀월기에 탄생한 황푸군관학교 이야기를 통해 장제스와 마오 그리고 린뱌오의 엇갈리는 운명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린뱌오는 장제스의 황푸군관학교가 배출한 최고의 군사 전략가였다. 장제스는 홍군을 택해 학교를 떠난 생도 린뱌오를 잃었고, 결국 그의 공격을 받아 중국 대륙을 잃었다. 린뱌오를 얻은 마오는 승리자가 되어 신중국을 건설했다. 이런 인간사의 엇갈림은 때론 역사의 엇갈림과도 맞물린다는 것이 이런 이야기의 교훈인 것이다. 아울러 책은 신중국이 자랑하는 불세출의 전쟁영웅 린뱌오의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장에선 일본군 천 명을 몰살하고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내쫓은 용장이 사실은 아주 수줍고 말이 없으며, 약골이란 사실을 동기생의 증언과 연애사를 들어 전한다. 그는 물, 바람, 빛, 소음을 두려워해 커튼을 친 사무실에 환기도 하지 않고, 대부분 집 안에 칩거하고, 음주가무를 도외시하며, 목욕도 하지 않고, 산수화조차 보지 않았다. 이런 그의 소심하다 못해 신경쇠약적인 모습은 훗날 린뱌오가 어떻게 문화혁명의 기수로서 마오 수첩을 만들어 마오를 홍보하는 데 열광하고, 탁월한 군사 에세이를 썼으며, 신중국에서 제2인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게 한다. 그는 과연 마오를 위협할 만큼 반역적이었던가. 그는 비전을 가진 지도자였던가. 과연 권력을 탐했던가. 주어진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이런 의문 앞에 우리를 서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숨은 이야기, 여담의 힘이다.

 

  자그마한 일화나 사건들이 그 자체의 일화로 그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일화가 의미 있는 징표가 되려면 그것이 거시적 담론과 연결되거나 혹은 사건의 진실을 캐는 데 일조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인 이야기 4>를 생소한 중국 현대사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역사학도라면 그것을 현대 중국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유용한 역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은 일종의 미시사다. 중국 현대사 개설서와 연표를 참조해가며 읽으면 우리는 인간의 목소리와 발걸음으로 가득한 현대중국사의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중국인이야기 4>의 백미는 정치 중심의 공적 역사의 그물을 빠져나간 여적(餘滴)에 있다. 이 여적의 역사가 주는 과외의 보너스로, 우리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사람살이의 독본을 읽는다. 그것도 평화 시가 아니라 혁명기의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속에서 친구와 적이 뒤바뀌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상황에 매몰된 사람과 그것을 이겨낸 사람, 두 얼굴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서 삶의 반면교사로 삼는다. 책 곳곳에 저자가 끼워놓은 촌철살인의 세평과 교훈적 잠언도 우리를 좀더 깊은 인간 이해의 장으로 인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완간되면 발자크가 그렇게 쓰고 싶어 했던 등장인물 2,000명의 인생교본 『인생희극』같은 책이 될 것이다. 여적(餘滴)의 역사, ‘비공식 중국인명백과사전’의 탄생을 기대한다.

 

 

 

   권영숙(서양사학 전공/성광 컨설팅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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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讀者),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_첫 번째 이야기

“독자가 써내려간 또 다른 ‘중국인 이야기’

차이니즈 나이트, 초여름 후끈한 열기 속으로!”

 

5월 28일,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의 출간을 기념하여 독자클럽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초여름 밤, 독자들은 상수역 한 카페에 모여 또 다른 ‘중국인 이야기’를 써내려갔습니다. 미처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이날 독자들이 나눈 열띤 토론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블로그에 소개합니다. 아울러 못 다한 이야기는 참석해주신 독자들이 직접 쓴 서평과 행사 후기로 이번 한 주간 한길사 블로그에 연재하겠습니다.

 

 




 

독자클럽 토론의 밤

독자, ‘중국인 이야기’를 말하다

 

진행: 차현인(여의도 백상치과 원장, 페이스북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독자클럽’ 회장)

패널: 강효백(대만 대표부, 주 상하이 총영사관, 중국대사관 외교관 역임, 현 경희대학교 법 과대학 교수,

                   <협객의 나라 중국> <차이니즈 나이트1ㆍ2> <중국인의 상술> <중국 각지 상인> 등의 저자)

        최종명(문화평론가, 중국여행전문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김경엽(백석문화대학교 중국어학부 강사, 독후감 대회 우수상 수상)

        이용석(성바오로병원 근무, <중국인 이야기> 열혈 독자)

        최창근(타이베이 국립정치대학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 현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 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

                  <대만, 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공저),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저자)

 

차현인: <중국인 이야기> 4권이 출간되고 정말 설렜습니다. 단숨에 두 번이나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셨나요?

 

최창근: <중국인 이야기>에는 국내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처음 소개되는 귀한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제4권도 아주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특히나 김명호 선생님의 다양한 참고문헌들, 즉 단행본을 비롯해 잡지와 영상자료들까지 그 전문성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김명호 선생님의 부지런함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김경엽: 4권을 읽고 1권부터 4권까지 등장인물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겹치는 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하나로 엮어지니 내용이 더욱 풍성해지고 인물의 일대기에 대한 이해가 쉬워졌어요.

 

이용석: 4권은 1,2,3권에 비해 분량이 줄었는데 내용적으로는 아주 만족했습니다. 평소 분단국가에 살면서 이념적 배타성과 한계를 느꼈는데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다룬 글을 보고 나니 그 한계를 극복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를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최종명: 10여 년 카메라를 들고 중국의 300여 개 도시를 여행하고 취재했습니다. 2013년, 이 책을 처음 알았을 때 정말 반가웠던 기억이 납니다. 중국의 근현대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김명호 선생님의 글쓰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김명호 선생님의 문체도 인상 깊었습니다.

 

강효백: 우리는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시안사변 이후 장제스는 왜 장쉐량을 죽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연금시켰는가?’ ‘중국에서 푸이를 보는 시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또한 영화 <마지막 황제>는 지극히 서양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한국인이 알아야 하는 중국인의 맨얼굴은 어떤 것인가?’ 등입니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의 현장 속으로

 

차현인: 강효백 선생님께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한 독자분께서 이런 말을 남기셨어요. “장제스와 장쉐량, 쑹메이링 세 사람의 관계를 너무 로맨스로만 몰아가는 것이 아니냐. 시안사변은 당시 여러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창근: 먼저 시안사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만에서 읽은 책 중에 탕더강(唐德剛)이라는 학자가 쓴 <장쉐량구술회고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장쉐량은 시안사변을 회고했는데요, 젊은 장군 장쉐량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동북군벌 장쭤린의 아들로 소원수(小元帥)라 불리던 장쉐량은 아버지가 일본에 의해 폭살당한 후 약 30만 명의 동북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장쉐량은 궁리 끝에 일본에 대한 '무저항정책'을 펼친 장제스에게 동북지방을 내어주고 근거지를 옌안으로 옮겼습니다. 청년 장군으로 국민의 신망을 받던 장쉐량에게 비난이 쏟아졌는데, 이에 장쉐량은 모욕감을 느낌과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배후공작의 귀재' 저우언라이에게 포섭되어 있던 양후청을 비롯한 측근들이 거사를 건의했고 그들과 도모하여 결국 시안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최종명: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사실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시안사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미 발생한 일이지요, 다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안사변은 공산당 입장에서는 ‘신의 한수’였다는 것입니다. 제2차 국․공합작과 항일전쟁 모두 시안사변으로 가능했습니다. 시안사변은 단순히 중국 국내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중국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쉐량은 장제스이 눈엣가시지만 죽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안사변을 함께 주도했던 양후청은 20세의 아들, 8세의 딸과 비서가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장제스에게 장쉐량은 풀어놓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훗날 장제스는 자신의 아들 장징궈에게 절대 장쉐량을 풀어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장쉐량은 50년이 넘게 연금 생활을 했습니다.

 




강효백: 저는 장제스에게 항일에 대한 진심성이 얼마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중 유일하게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에 대한 자긍심이 상당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본에 대해 호의적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장제스는 타이완과 만주까지는 일본에게 넘기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중국 내륙 침략까지는 두고 볼 수 없었겠지요. 장제스를 친일적 인물이라고까지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본에 매우 유화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장제스이기에 시안사변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양쯔강 이북까지 차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안사변은 중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제스가 장쉐량을 끝까지 죽이지 않고 연금만 시킨 것은 아마도 장쉐량에게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문이자 가혹한 형벌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영숙(독자): 시안사변은 좀더 국제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시 중국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외에 일본이라는 강력한 변수가 존재했습니다. 소련은 장제스가 내전과정에서 일본과 화친하면 일본의 예봉이 소련을 향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했습니다. 중국에 항일전선이 수립되길 바랐어요. 국공합작을 통해 세력이 미약한 중공 대신에 장제스가 항일의 총대를 매주기 바란 것입니다. 시안사변은 소련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반영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민심도 항일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역사적 사건을 이분법적인 이념론으로 보기보다는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황푸로 가자!

 

차현인: 독자 패널들의 여러 의견 잘 들었습니다. 중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인 만큼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데, 다음 기회에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제4권 표지에 재미있는 발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떠났다. 차(茶)도 식었다.” 이 말은 장제스가 린뱌오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합니다. 둘은 적대적 관계였는데 어떻게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제4권에는 장제스, 저우언라이, 후쭝난, 슝샹후이, 린뱌오 등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중국 혁명의 주역이 된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최창근: 개인적으로 후쭝난의 일화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장제스가 매우 신임했던 장군 중 하나인 후쭝난이 공산당과 싸운 옌안전투에서 어이없게 패배했습니다. 후쭝난이 간첩이 아니었다면 신무기로 무장한 50만의 병력이 공산당에게 패배할 이유가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장제스는 후쭝난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가 죽었을 때도 조문을 하지 않고 있다가 측근에 의해 마지못해 조문을 갔었지요. 후쭝난의 아들 후웨이전은 자신의 아버지 후쭝난이 공산당의 간첩이었다는 내용의 책이 타이완에서 발간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떳떳했다면 굳이 막을 이유는 없었을 것 같은데, 후쭝난 간첩설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김경엽: 저는 “신중국 수립 이전의 역사는 황푸군관학교 출신끼리의 싸움이었다”는 김명호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특히 린뱌오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장제스에게 후쭝난이 있었다면 마오쩌둥에게는 린뱌오가 있었습니다. 제4권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린뱌오는 타고난 약골이었다. 황푸군관학교 학생 시절 새벽 구보에서 낙오하는 학생은 린뱌오가 유일했다. 거의 매일, 구보가 끝나면 교관에게 따귀를 한 대 얻어맞고서야 아침을 먹으러갔다. 동기생 사이에서 요즘으로 치면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156쪽

 

이런 린뱌오가 어떻게 중공 최고의 군사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개인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상호모순되는 길을 걸었던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제1권에도 ‘물과 햇빛과 바람을 싫어한 천하명장 린뱌오’라는 제목으로 린뱌오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장점은 처음에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인물의 일대기가 하나로 합쳐져 통합적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1권과 4권의 내용을 합쳐 간략하게나마 린뱌오의 일대기를 그려보았습니다. 1927년 제1차 국ㆍ공합작이 깨지면서 혁명 제1세대들이 곳곳에 흩어져 무장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지요. 그 후 실패한 사람들이 징강산으로 모여들었고 린뱌오는 이때 마오쩌둥과 대면하게 됩니다. 1934년부터 대장정을 통해 본격적인 혁명의 길로 들어섰고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매번 승리합니다.

장제스는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린뱌오의 목에 현상금 10만 원을 겁니다. 1936년 시안사변 이후 제2차 국ㆍ공합작과 항일 전쟁이 가능해졌고, 중국은 일본과의 싸움에서 린뱌오가 처음으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린뱌오에게는 ‘전쟁마귀’ ‘전쟁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일본군 군복을 입고 시찰하던 린뱌오는 국민당군의 오발로 머리에 총상을 입게 됩니다. 린뱌오는 치료를 받기 위해 1937~41년까지 두 번째 부인 류신민과 함께 소련에 머물렀습니다. 사회자님이 말씀해주신 이 책의 표지 발문, “사람이 떠났다. 차(茶)도 식었다”는 린뱌오가 소련에 머물던 시절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 시절 린뱌오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며 남긴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타고난 성격이 소심했던 린뱌오는 활발하고 외향적인 류신민과 다르게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했고 사교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하고 1941년 혼자 귀국을 합니다. 이후 마오쩌둥은 몸이 약해진 린뱌오를 더 이상 전쟁에 내보낼 수 없다고 판단해 항일군정대학 교장으로 임명합니다. 제4권의 전체 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해라. 혁명은 불(火)로만 되는 게 아니다. 활활 타오르려면 바람(風)이 필요하다. 신문을 발간하고,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어라. 그걸 할 사람은 중국 천지에 너밖에 없다. 린뱌오가 한 명인 것이 애석하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 5쪽, 171쪽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항일군정대학 교장으로 임명하면서 한 말입니다. 린뱌오는 국ㆍ공내전 때 동북민주연군 총사령관으로 다시 전쟁터로 복귀하게 됩니다. 재래식으로 무장한 10만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미군의 원조를 받은 60만 명의 장제스 군대를 동북에서 몰아냈습니다. 신중국 수립 후 1959년 펑더화이가 실각하면서 린뱌오는 국방부 장관으로 부각, 1969년 공식적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됩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1971년 소련으로 향하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발표는 “마오쩌둥과 갈등을 겪던 린뱌오가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소련으로 가는 도중 추락했다”는 것이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궁으로 남아 있는데, 린뱌오와 마오쩌둥의 갈등은 󰡔중국인 이야기󰡕 제5권에서 다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린뱌오는 타고난 군사적 감각으로 마오쩌둥과 장제스 모두의 관심과 신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를 종합해봤을 때 그는 매우 소심하고 은둔적 성향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모순되는 지점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린뱌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여 독자: 저는 의견 다릅니다. 강효백 선생님께서는 장제스의 항일 전쟁에 대한 진심성을 의심하셨는데요, 저는 장제스는 시안사변이 아니었어도 끝까지 일본에 저항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장제스는 운이 없었습니다. 린뱌오가 뛰어난 장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장제스 옆에는 바이충시나 다이리 같은 린뱌오 못지않게 뛰어난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들이 폄하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효백: 맞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아야겠지요. 린뱌오를 이해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중국에서는 “구두족, 즉 후베이 지역 사람들은 뇌가 아홉 개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생각이 많고, 속을 알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린뱌오가 바로 후베이 사람입니다.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을 멋지게 불러주신 장재흥 독자님.

 

푸이, 두 번이나 이혼 당한 황제

 

최종명: 푸이에 대한 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영화 <마지막 황제>를 다시 보았습니다. 세계적인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영화지요. 그래서 당시 한국에도 개봉이 가능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극히 서양 중심적인 영화이고, 중국 내에서는 영화를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많았습니다. 푸이는 일본을 이용하면 청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주 괴뢰정부의 꼭두각시 황제로 살았고, 체포 전까지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요. 저는 중국 각지를 여행하며 특히 중국 황제들의 무덤을 여러 번 보게 되었습니다. 가보신 분들도 있으실 테고 짐작도 하시겠지만 굉장히 크고 화려합니다. 황제로 무덤에 묻힌 마지막 인물은 광서제입니다. <중국인 이야기> 제4권에 보면 푸이가 리위친과 이혼하고 전범관리소에서 나와 리수셴이라는 간호사와 결혼을 합니다. 푸이의 마지막 부인인데요, 리수셴은 푸이가 죽자 푸이를 청나라 황제로 인정하여 황제의 묘지에 묻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고 광서제 무덤 뒤쪽에 있는 사설 묘지에 묻혔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황제에서 평민이 된 푸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차현인: 푸이는 리위친 말고 원슈와도 이혼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슈와는 왜 이혼을 한 것이지요?

 

최종명: 푸이는 완룽, 원슈와 같은 날 결혼을 합니다. 푸이는 완룽보다 원슈를 더 좋아했습니다. 푸이가 청나라 황제에서 물러나 만주로 가기 전, 천진에서의 생활은 황족들 모두에게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원슈는 황족에서 평민으로 전락하는 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완룽의 질투를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푸이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 일로 푸이는 완룽을 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완룽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아편에 빠져 정신 이상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북ㆍ중 관계와 우리의 미래

 

차현인: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의 제4부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중국 수립에 북한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까요?

 

강효백: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6ㆍ25입니다. 중국은 소련과 미국에 맞서는 이 위험한 전쟁에 왜 참전했을까요? 단순히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 때문일까요? 사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렸고 친(親)소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마오쩌둥이 가장 두려워했던 나라는 미국이 아닌 소련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오쩌둥이 동북왕 가오강을 경계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국ㆍ공내전이 끝난 이후 동북 3성은 중국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남기고 간 전쟁 물자와 신무기, 군수 공장 등 모든 자원이 밀집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가오강도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매우 친소련적 인물이었습니다.

여기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의 표지를 보시면 문화대혁명 시기 린뱌오의 포스터가 있습니다. 동북 3성의 거리에는 이와 비슷한 가오강의 포스터가 난무했습니다. 그만큼 동북 3성 사람들에게는 마오쩌둥보다 가오강이 친숙하고 존경하는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마오쩌둥은 전쟁에서 밀린 김일성이 만주로 도망이라도 오는 날에는 만주는 미국과 소련의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소련과 미국이 중국 내지로 영향력을 넓히는 일은 순식간이겠지요. 마오쩌둥은 이것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비유하곤 합니다.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의 한쪽이 망(亡)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입니다. 그러나 원래 순망치한은 중국과 만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70년대 저우언라이가 외교적으로 이를 북한으로 확대 해석한 것입니다. 어쨌든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으로부터 만주를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전쟁터를 더 아래로 삼기 위해 북한을 도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큰아들인 마오안잉을 제일 먼저 전쟁터로 보내면서 솔선수범했고, 전쟁터에서 죽은 마오안잉의 무덤을 북한에 그대로 남겨 ‘피의 부채’로 삼았습니다. 물론 항일 전쟁과 신중국 수립에 북한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마오쩌둥의 진짜 속마음은 소련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북중관계는 1992년까지 혈맹관계였으나 한중수교 이후 감정이 틀어졌고, 결정적으로 1993년에 2000년 올림픽 개최지를 두고 시드니와 베이징이 경합할 때 북한이 공개적으로 시드니를 지원하면서 북중관계는 전통적 우호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북중관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예부터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좀더 적극적으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제도, 사람들의 성향을 알기 위한 노력은 결국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이미 한 발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중국인 이야기>는 삼국지보다 더 흥미로운 근대 중국인들을 다뤘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중국인 이야기>에서 현대 중국인들의 이야기까지 씌어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인 이야기>는 30권까지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차현인: 오늘 독자클럽 토론회의 사회를 맡으면서 사회자로서 내심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자 패널들께서 보여주신 이 토론의 열기를 느끼고 나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알찬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하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건전한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저자, 독자와 함께 책을 만드는 편집자

 

지난 5월 18일, <중국인 이야기> 제4권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편집자로서 한 해에도 다양한 종류의 책을 만들어내지만 <중국인 이야기>에 대한 제 감상은 매우 특별합니다. 무엇보다 <중국인 이야기>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페이스북 독자클럽은 현재 회원 수 2,000여 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꾸준히 가입신청을 하고, ‘중국을 알고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마당’에 모여듭니다. 이곳에서는 <중국인 이야기> 등장인물과 주요 사건, 중국 소수민족, 중국 영화와 음악 등 각자가 경험한 중국에 대한 지식을 활발하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이야기와 볼거리가 풍성합니다.

 

행사는 예상 시간을 훌쩍 넘어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습니다. 일방적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모습에서 독자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열띤 토론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독자들의 눈빛이 아직도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중국인 이야기>는 시작부터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독자와 함께해온 책입니다. <중국인 이야기>의 독자들은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독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전 10권으로 기획한 <중국인 이야기>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독자 여러분들이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짜이찌엔!(再见)

 

 

by 명랑 에디터 프시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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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한길다반사2015.05.22 15:21






"그가 간 지 6년이나 흘렀다.

 그를 쓰면서 비로소

 그를 잊을 수 있었다."

 -작가 김수경, 6주기에 즈음하여 노무현을 그리며




약간씩 가팔라지는 언덕길을 조그만 봇짐 하나 지고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노무현이 죽고 난 다음부터 줄곧 그랬다.

안타까움, 어떤 미안함, 아쉬움 같은 것들이 서로 섞여 묘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난해 말 소설 『내 친구 노무현』을 탈고하고 난 이후에는

그 느리고 먼 길의 어느 도중에 잠시 짐을 내려놓고 앉아 쉬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를 쓰면서 그를 잊어버렸던 거다.

지워갔던 거다.

휴식하자던 것이 자꾸 길어졌다.

이 가벼움,

이 편안함에 좀더 눌러 있어야지.

그리고 나는 이제 비로소

그를 내 문학 속의 한 인물로

연민도 사랑도 없는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화가 지웅이 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무언가 모를 미안함에 사로잡혔다고 그랬지.

'나의 봇짐이 네 어깨 위로 옮겨 갔나 봐'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것은 소설이다』에서는 좀더 비정해져야지.

그는 나의 사적인 친구도 대통령도 아니고 내 소설이라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이다.

하나의 캐릭터다.

과연 내가 이 작업을 잘 마칠 수 있을까.


그가 간 지 벌써 6년이나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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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한길다반사2015.05.20 14:54

[작가 김수경이 노무현을 그리다-두 번째]

당대성과 진실성 사이에서 균형 잡기




『내 친구 노무현』의 작가 김수경의 두 번째 작품 『이것은 소설이다』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두 번째 작품을 상재함으로써 총 3부작으로 구성된 그녀의 문학적 여정이 7부 능선을 넘었다. 『이것은 소설이다』의 시간적 배경은 참여정부 5년의 기간과 겹친다. 그러나 『내 친구 노무현』에서 충분히 확인되었듯 근래 김수경의 글쓰기의 핵심은 정치실록이나 정치비사 따위에 있지 않다.


김수경은 말한다.


“『내 친구 노무현』을 펴내고 나서 노무현을 많이 잊었어요. 좀 자유로워졌어요.”


이 말을 김수경이 노무현과 결별했다거나 망각했다는 뜻으로 읽었다면, 그것은 심각한 난독증이다. 위 고백 속에는 ‘노무현이란 텍스트’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파란의 한 시절을 보냈던 작가의 자기 관조와 자기 해방의 페이소스가 들어 있다. 문학은 때론 해원(解怨) 의식과 씻김굿을 위한 아주 효율적인 수단이다. 그것은 오직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소설이다』 또한 『내 친구 노무현』과 같은 글쓰기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수경은 문학을 지난날의 정치·사회적 사건을 공론화하거나 재소환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놓였던 정치·사회적 파장 안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횡령’ ‘배임’ ‘탈세’ 따위의 지리멸렬하고 세속적인 정치적 외연을 걷어내고, 선정적 저널리즘이 덧씌워놓은 그물을 찢고 솟아오르고자 한다. 김수경은 그 무엇도 아닌 온전한 작가로서의 자리로 귀환하고자 한다.


귀환의 필요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사건의 미적 재구성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김수경이 확보하고 있는 수많은 자료들은 작가로서의 안목과 품격에 의해 새롭게 배열되고, 통제되고, 해석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김수경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사실 노무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노무현에 대해 글로(특히 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수경은 작가로서의 위치, 정치화된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로서의 위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이중적 자리는 김수경에겐 커다란 문학적 자산인 동시에 딜레마다. 당대의 사건 관련 인물들이 아직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어디까지 발설하고 은폐할 것인지, 작가가 구사할 고도의 문학적 장치나 전략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김수경은 ‘실천가’나 ‘운동가’도 아니고, 협소한 진영논리에 갇힌 ‘주의자’도 아니다. 그녀가 이러한 딜레마를 돌파하는 방법은 오직 작가, 소설가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굳건히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거짓과 허위, 왜곡에 맞서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문학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학의 위의(威儀)란 다른 데 있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은 아직 텅 빈 기표다. 작금의 정치상황이 지속되는 한,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요원하기만 하다. 오백여 년 전 이순신이 당대의 작가 김훈에 의해 ‘문학적으로’ 호출되었듯, 아마도 먼 훗날 이 땅의 작가들이 노무현을 같은 방식으로 호명하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에서 수행되는 작가 김수경의 글쓰기는 훗날의 노무현 평가를 위해 당대에 이룩한 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김수경의 글쓰기는 지난날의 자아와 대면하는 문학적 고백이라는 점에서 일단 탈정치적이다. 그러나 작가와 노무현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어떤 형식으로든 노무현의 그림자가 음화처럼 드리워질 것이라는 점에서 은밀히 스며든 정치성과 정치적 독법은 불가피해 보인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문학이 정치를 사유하는 건, 오래된 관행이자 미덕이다.


『이것은 소설이다』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작가 김수경의 고투하는 자아와 실존의 문학적 투영인 동시에 은밀한 정치성의 향연일 수 있겠다. 너무도 탈정치적이어서 어쩌면 너무도 정치적인 소설. 당대성과 진실성 사이에서 균형 잡기.


김수경은 원고 집필 시간에는 늘 음악과 함께한다고 한다. 몰입, 리듬, 영감, 환상과 함께 문학이 태어나는 시간이다. 며칠 전 작가의 자택을 잠시 방문했을 때 정갈하게 내놓은 수제 햄버거처럼 한 층 한 층 소설의 성채를 건축 중이던 작가 김수경. 햄버거 안의 고기와 야채 맛이 제각각이듯 문학과 정치, 문학과 권력 등 상호 이질적인 성분들에 대한 독자의 사유를 유발하는 그녀의 문장들은 작가 김수경의 소설이 제공하는 또 다른 맛일 것이다. 이것이 독자를 매혹한다.






-독자 김경엽(백석문화대학교 중국어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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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한길다반사2015.05.19 15:38

[작가 김수경이 노무현을 그리다-첫 번째]

"그를 처음으로 잊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 속을 걸어간다는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몸짓으로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는 것.

-폴 발레리

 


작가 김수경이 '친구 노무현'과 함께 걸었던 시간을 되짚으며 힘들게 써낸 글은, 한 권의 보랏빛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뒤 벌써 여섯 달이 흘렀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오랜만에 김수경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내 친구 노무현』에 담은 그 기억들을 함께 돌아보고, 뒤이을 『이것은 소설이다』 집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날의 만남 스케치, 『내 친구 노무현』과 다가올 『이것은 소설이다』 리뷰, 마지막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를 맞아 김수경 선생님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담담한 술회까지. 이 모든 것을 총 4회에 걸쳐 바로 이곳, 한길사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다시 돌아온 봄날은 여전히 화창하네요. 먼저 떠난 고인이 그립습니다.

 



 

한길사(이하 '한'): 다음 주면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입니다, 선생님.

 

김수경 선생님(이하 '김')사실 요즘 그를 잊고 있었습니다. 『내 친구 노무현』을 쓰고 나서 노무현을 비로소 잊어버릴 수 있었어요. 노무현이 죽은 뒤 (그를 이렇게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처음이에요. 언어의 홍수에 실려 떠내려간 것 같기도 하고. 드디어 노무현을 졸업하는 걸까요. 치유가 되어가나 봐요.

올해는 이렇게 그냥 지나가버리네요. 1주기 땐 봉하에 갔었고… 예전에는 신해철이 콘서트 하자탁현민이 추모 행사 하자 연락이 왔었는데 이번엔 별다른 얘기가 없습니다이렇게 날 찾아온 한길사 빼고는.

 

: 『내 친구 노무현』 출간 이후 기억에 남는 독자 소감이 있나요?

 

: 알고 지내는 한 화가가 그러더군요. 책을 읽다 보니 "(노무현은 죽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정말 고마운 소감이었습니다.

 

: 『내 친구 노무현』의 뒤를 잇는 『이것은 소설이다』를 조금 미리 독자분들께 소개해주세요.

 

: 『내 친구 노무현』은 제가 제 삶에서 만난 강렬한 인간,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1987년 부산 거리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가 대통령이 된 2002년까지. 『이것은 소설이다』는 『내 친구 노무현』이 끝나는 지점, 즉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날 시작해서 저에 대해 세무조사가 진행되는 데까지를 그립니다. 그 시대를, 그 기간의 제 삶을 노무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석해보려는 것입니다.





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뒤 그의 임기 동안에는 그와 두세 번밖에 연락을 안 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만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던 셈입니다. 얼마나 그 속에 '날조'가 많던지요! 내가 아는 그 사람과 사회적으로 프레임 씌워진 노무현 사이에는 참 간극이 컸습니다. 사회적 프레임으로 보는 노무현보다는 제 소설이 훨씬 진실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진심이 가득 담기기도 했고요. '팩트'(fact), '진실'을 표방하며 쓰여진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소설'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가파른 내용의 책이지요. 검사실을 드나들며 세무조사 받을 때 이야기니까. 그런 와중에도 '그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게 할 수 있을까'가 제 고민입니다. 쓰는 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기사 인용이 많아 딱딱한데, 그 내용들을 부드럽게 이을 연결고리를 찾고 톤을 맞추기가 힘듭니다. 잡지 기사를 문학 텍스트로 승격시키는 것도 어렵고요. 어떨 때는 세 시간 내리 앉아 있어도 한 문장밖에 쓰지 못합니다.

 

: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만 최근 정치가 참 시끄럽습니다. 선생님께선 '정치' 문제로 삶에 큰 고통도 겪으셨지요. 『이것은 소설이다』가 바로 그 이야기고요. 요즘의 정치를 보면 어떤 단상이 드세요?

 

: 제가 변했다는 것을 느껴요. 예전엔 분노도 크고 그랬는데 이젠 많이 없어졌어요. 다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알고, 그러니 용서 못할 것도 없고... 이젠 그냥 다 제각각인 인간유형으로 느껴집니다.

 

: 노무현은 선생님께서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했던 사람으로 손꼽힌다고 하셨지요.

 

: 노무현은 변호인인데도 사기를 많이 당했더라고요. (역설적으로) 그래서 믿음이 갔어요. 제가 들은 노무현의 말에는 한마디도 거짓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정말 담백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어요. 인생에 그런 사람을 열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편집부 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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