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그레이트북스2014. 9. 24. 09:56

한길인문고전아카데미

아서 단토 깊이 읽기 -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탐색하다

『일상적인 것의 변용』

 

 

한가로운 토요일 오전의 미술관을 좋아하시나요

 

아무 말 없이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며 말로 된 위로보다 위안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대리석 조각상을 마주하는 게 체온보다 더 따뜻할 때도 있고요. 보고 싶은 전시회가 생기면 별 준비 없이 가보는 편이지만, 현대미술일 경우에는 망설여집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대미술 전시에 관해서만큼은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가을에 다시 시작된 한길인문고전아카데미 ‘아서 단토 깊이 읽기’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게 된 미학의 역사를 공부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맡은 김혜련 선생님은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을 번역하셨는데요, 예술철학뿐만 아니라 인식론, 역사철학, 행위이론, 심리철학에 걸친 단토의 철학을 세 가지 질문을 통해 풀어냈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가

 

언어의 의미가 지시대상이나 항구적인 본질에 기초한다는 생각을 의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반(反)본질주의적 혁명은 예술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낱말의 의미는 어떻게 결정될까요.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는 생활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법을 따릅니다. 우리가 표준어라고 부르는 것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이는 한 사회의 중심축을 이루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낱말의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경청하기보다 실생활에서 사람들이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상황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지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사와 미학의 역사에서 예술의 본질로 제시되었던 것들은 각각 해당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예술에서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본질’의 지위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예술이란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은, 낭만주의 시대에 천재 예술가들이 제2의 창조자로서 자신들의 미적 이념(aesthetic idea)이나 내적 비전(inner vision)을 예술형식으로 체현했던 것이고, 감상자들의 작품의 완성도와 미적 가치를 숭앙하며 예술의 본질을 표현성에 있는 것으로 수용했던 관행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니멀리즘 예술은 감정의 표현을 목표로 하지 않고 단지 예술매체의 물질성 자체를 보여줍니다. 미니멀리스트 미술이나 음악, 무용 같은 예술은 내면에 대한 관심과는 거리가 멀고 오직 눈이나 귀로 접근할 수 있는 매체의 물질적 면모를 흥미로운 것으로 다룹니다. 예술은 의미 있는 형식이라는 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을 확정 지을 수 없는 퍼포먼스나 일회성 해프닝, 또는 형식을 갖고 있기는 해도 형식이 중요시되지 않는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예술에는 형식주의 정의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들라쿠르아, 「민중을 이끈 자유의 여신」

 

 

 

루이스 부르조아, 「감사와 은총」(오른쪽) 「본성탐구」(왼쪽)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되었던 것들이 이처럼 예술의 하부집합들의 미적 가치와 유의미성을 지시할 뿐이라면, ‘예술’이라는 명사는 과연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작품에 붙이는 ‘예술’이라는 낱말이 사실은 명목적인 명찰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로 어떤 것을 예술이라 부르는 것일까요. 어떤 것은 예술이지만 어떤 것은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단토는 전통적 의미의 예술의 본질을 거부하면서 특이한 종류의 본질을 밝히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것의 변용』 제1장에서 단토는 사고실험의 한 형태로서 가상의 전시회를 엽니다. 이 전시회에는 단토의 예술개념과 예술철학의 성격을 결정짓는 붉은 사각형들이 등장합니다. 이 붉은 사각형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차이점이라고는 오직 작품을 만든 제작자와 제목이 서로 다르다는 것뿐이죠. 이 붉은 사각형들에는 각각 「키르케고르의 기분」,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 「니르바나」, 「붉은 사각형」, 「무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예술가는 의도는, 첫 번째 어떤 물리적 대상에게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과 연관됩니다. 이런 종류의 의도는 단순한 지각적 식별능력에 의해 파악되지 않죠. 붉은 사각형들이 겉보기에는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예술작품의 구체적인 지각적 면모에 의미론적 기능을 부여하는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키르케고르의 기분」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사각형의 붉은색은 불안과 연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색으로서 붉은색 자체가 불안을 나타내지는 않는데, 「키르케고의 기분」의 붉은색이 불안감을 표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작품을 만든 화가가 그 사각형의 붉은색으로 하여금 키르케고르의 심리적 상태를 지칭하도록 의미론적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술가의 의도는 작품 제작 당시에 예술가가 속해 있는 예술계에서 수용되는 예술개념과 예술이론, 규약 등에 의해 제한됩니다.

 

단토가 제시하려는 예술작품의 존재론은 바로 예술가가 작품에 대해 갖는 ‘의미론적 기능의 부여 가능성’을 축으로 합니다. 즉 작품의 개체화는 작품의 물리적 상대역(physical counterpart)의 단순한 동일성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작품에 부여하는 예술이론적 차원의 지향성(intentionality)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지요. 원칙적으로 예술가는 작품에 어떤 의미론적 기능이든지 부여할 수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그가 속한 예술계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이론들의 범위에 의해 제한됩니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의미는 예술가에 의해 결정될까요

 

 

브뤼헐,「이카로스의 추락」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그림의 제목은 「이카로스의 추락」입니다. 오른쪽 하단에 그려진 바다에 빠진 다리는 그림 전체에서 시각적으로 그리 큰 비중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목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그림을 이카로스가 공중에서 추락해 물에 빠진 신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특정한 서사적 틀에 의한 지각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해석 가능성의 단서는 일차적으로 그림의 제목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제목은 해석을 위한 지침이며, 그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그 주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론을 제시합니다. 단토가 제안하는 ‘예술적 동일시’(artistic identification)는 단순한 지각 양태가 아니라 문제의 대상에 예술계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동일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존재론적 변용(transfiguration)을 동반하는 변용적 동일시입니다. 관람자의 예술적 동일시를 통해 대상은 단순한 실재적 사물의 영역에서 의미의 영역, 이 경우에는 예술계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죠. 따라서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것은 단순한 명명이 아니며, 변용의 절차로서 해석은 선택된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동일성을 대상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세례와 비슷합니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의 소변기는 해석에 의해 예술적으로 동일시되기 전에는 단순한 실재적 사물입니다. 그러나 예술가와 해석자가 접근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예술이론을 통해 단순한 실재적 사물에는 적용되지 않는 변용적 동일시를 수행하고, 그 결과 새로운 종류의 개체로 태어난 것이죠. 따라서 해석은 예술사에 관한 지식, 예술이론에 관한 지식, 나아가 근본적으로 예술개념 자체에 관한 지식을 통해 한 대상을 예술로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실재적 사물로서 소변기의 동일성과 예술로서 소변기의 동일성의 차이가 지각적으로는 식별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언제 한 사물에 대한 해석은 예술적 해석이 되는 것일까요

 

예술의 은유적 구조는 존재론적으로는 변용을 통해, 의미론적으로는 수사법과 표현 양식을 통해 구축됩니다. 예술이 지각적으로 음미되고 그 의미가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예술가의 의식을 매체를 통해 체현하고 관람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죠. 감상자들은 수사법과 표현양식을 탐지해낼 수 있는 일종의 독해능력을 습득함으로써 예술작품의 은유적 의미를 해독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순수한 눈으로 탐색하는 것은 작품의 표현적 속성, 즉 은유적 의미를 놓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작품을 마음의 눈으로 탐색하는 것은 작품의 의미를 매체의 결에서 분리시키고 추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탐색은 어느 것도 예술작품을 온전하게 다루지 못합니다. 감상자의 과제는 의미론적 규약에 따라 작품의 의미를 해독할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 수행된 수사법과 표현양식을 구별해냄으로써 매체의 결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단토는 제거될 수 없는 예술가의 개성이 작품의 매체적 특질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스타일이라고 말합니다. 스타일은 곧 사람이다는 말도 있죠. 예술을 아는 것과 사람을 아는 일이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길인문고전아카데미 다음 강의는 ‘레비-스트로스 깊이 읽기’입니다. 문명과 야만의 경계 그 너머를 얘기하는 시간이 될 텐데요, 이번 주 목요일 마포도서관에서 뵙겠습니다.

                                                                                               

-편집부

*보다 자세한 수업내용은 강의안을 참고하세요.

아서단토 깊이읽기_김혜련 선생님.hwp

 

 


일상적인 것의 변용

저자
아서 단토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08-05-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일상적인 것의 변용』은 “무엇이 어떤 것을 예술로 만드는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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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저자
에드먼드 버크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10-06-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우리는 바땅히 미와 숭고를 비교해야 한다. 그리고 비교를 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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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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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2014.09.24 21:02 [ ADDR : EDIT/ DEL : REPLY ]
  2. 안녕하세요. 제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 이라는 번역본 책을 읽고 있는데, 뜻이 안 잘 통하는 곳은 원문과 대조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원문과 대조하면 대부분 이해가 가는데, p. 70 (번역본) [원본 p.2] 다음 문단은 조금 어렵네요.

    그러나 그 그림은 붉게 칠해진 캔버스의 평면 처럼 공허하지는 않고,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페이지처럼 공허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내가 내방의 벽을 붉게 칠했다면 그랬을 것 처럼 그 그림에 어떤 기술이 적합한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Yet the painting is not empty in anything like the way that mere expanse of red-painted canvas is, which is not even empty as a blank page might be, for it is not plain that it awaits an inscription, any more than a wall of mine might were I to paint it red.

    원문 자체가 난삽하네요. 아서 단토님이 살아계시면 직접 질문을 하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번역자가 단토가 살아 있을 때 문의를 좀 했으면 좋았을 뻔 했네요. 전체적인 문장구조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듯 한데, "it awaits an inscription" 에서의 "it"가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번역의 관건인 듯 합니다. 번역본에서는 문장구조를 파악할 때 크게 두가지 선택을 했습니다. (1) 관계대명서 "which" 가 가리키는 것이 가까이 있는 "mere expanse of red-painted canvas" 가 아니라, 멀리 있는 "the painting" 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2) 그리고
    "it awaits an inscription" 에서 "it" 가 는 문맥상 관계대명서 "which" 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번역본에서는 "which" 가 "the painting" 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it" 도 "the painting" 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which" 와 "it" 가 "mere expanse of red-painted canvas" 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는 않는지요?

    2016.01.17 13:20 [ ADDR : EDIT/ DEL : REPLY ]
  3. 0677

    그리고, it is not plain that it awaits an inscription 이라는 문장의 뜻이 분명하지 않은데, 문맥상 "it awaits an inscription" 은 어떤 대상이 누군가가 뭔가를] 새겨 주기를 기다리면 내용이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empty 라고 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로 충분하므로 empty 가 아니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 같습니다. 이 문단에는 empty 라는 술어를 쓸 수 있는 3가지의 종류의 물체가 언급됩니다. (1) The painting ( 문자적으로는 'rather" (somewhat) empty 하지만 의미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2) mere expanse of red-painted canvas ( 뭔가 inscription 을 기다리는 empty canvas), (3) 빈 페이지 (blank page) 가 그것입니다. (1) 은 painting 작품으로서 empty하지 않고, (2) 는 empty 이지만, (3) 만큼 empty 하지 않다고 합니다. (2) 가 (3) 만큼 empty 하려면 뭔가 inscription (새기는 것) 을 기다려야 되는데, (3) 과 달리, (2) 는 그게 분명하지 않아서 (3) 만큼 empty 하지 않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내가 붉게 그린 벽" 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거구요.

    2016.01.17 13:54 [ ADDR : EDIT/ DEL : REPLY ]
  4. 0677

    위와 같이 해석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토는 책제목과 같은 제목의 논문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vol 33, Issue 2, 1974, 139-148)을 출판한 바 있는데, 거기에 비슷한 문장이 나옵니다. Yet the painting is not empty in the way in which a square of primed canvas, indiscernible from our work, may be: an empty canvas awaiting an Annunciation, say. empty canvas awaiting an Annunciation 에서 Annunciation 은 성모희보 또는 수태고지 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그림을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죠. 즉, 이 귀절은 수태고지 그림을 그릴 빈 캔버스 라는 뜻입니다. "수태고지 그림을 기다리는 빈 캔버스"... 위 번역본에서는 이 귀절에 해당되는 것이 "it awaits an inscription" 입니다. Annunciation 대신 inscription 을 쓴 거죠. 번역본은 이 부분도 잘 못 파악한 것 같습니다. inscription 은 빈 캔버스에 새겨 넣을 어떤 것을 가리키고, Annunciation 은 특수한 형태의 inscription 이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not empty in [anything like] the way that mere expanse of red-painted canvas" 는 붉은 페인트칠 것에 불과한 캔버스가 비어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의미로 (는) 비어있지 않다 고 번역해야 뜻이 잘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붉은 캔버스 처럼 비어 있지 않다고 하면 뜻이 혼돈을 줄 것 같습니다. 수태고지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는 문자 그대로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painting 은 "rather empty" 라고 앞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를 부정하는데,그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부정합니다. 즉, not empty in the WAY that empty canvas awaiting an inscription is empty. 뭔가 새겨지기를 기다라는 빈 캔버스가 비어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 거죠. 똑같이 비어 있는 빈 캔버스를 하나는 작품으로 하나는 단순 사물로 구분하려는 글이므로, 미세한 논리적인 구분이 중요한데, 이것이 번역과정에서 많이 무디어 진 것 것 같네요.

    2016.01.17 14:34 [ ADDR : EDIT/ DEL : REPLY ]

한길다반사2014. 9. 11. 15:16

학담평석 아함경』의 표지작가 김혜련 선생을 만나다

 

지난 9/3(수) 늦은 오후 6시,

신사동 313 아트프로젝트에서는 화가 김혜련 선생의 개인전 개관식이 있었습니다.

김혜련 선생님은 『학담평석 아함경』의 표지그림 <초봄>을 그려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날 전시에서는 <초봄> 열두 점도 전시가 되었는데요,

매번 표지 시안으로 만나고 또 완성된 책 표지로 접하던 진달래 꽃이지만,

갤러리에 걸린 원화 작품을 보니 새롭고 또 다른 감화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날 나눈 김혜련 선생님과의 대화를 살짝 공개합니다.

 

 

 

 

1. 작품 「초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한길사와 어떤 인연으로 그림을 부탁 받게 되셨는지요?

 

2012년 연말이었습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님께서 헤이리 북카페에서 제게 <진달래>라는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격찬하시며 서점에 있던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 꽃』을 선물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함경을 연구하는 학승이 계시다고 아함경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론을 하셨습니다. 당시 대화에서는 아함경과 진달래는 별개의 주제였죠. 일 년 후 아함경의 표지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2. 불교에 관한 책이라면 흔히 연꽃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어째서 연꽃이 아니라 진달래를 선택하셨는지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사실 처음 김 대표님께 진달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역시 너무 흔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시집을 읽으면서 소월에게 진달래의 어떤 점이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진달래를 보고 싶은데 당시에는 초봄이라 아직 제 주변에 진달래가 피지 않았었어요. 제가 사는 파주는 봄이 늦게 오니까요. 궁금증에 꽃이 피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기어이 진달래를 보러 2013년 3월 창원의 천주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진달래가 어떻게 소월의 시가 되었는지, 철쭉과는 어떻게 다른지 나름대로 관찰과 사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 마음에는 이 꽃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일 년이 다시 지난 후 『학담평석 아함경』의 표지작품을 정식으로 의뢰 받았습니다. 처음 제의 받은 주제는 단순히 ‘꽃’이었고, 연꽃에 대한 자료를 받기도 했지요. 그러나 불교의 상투적인 상징인 연꽃이 아닌, 제 체험에서 나온 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한국의 대표적 꽃인 진달래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학담평석 아함경』의 출판에 적용시키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3. 한길사로부터 표지 작업을 의뢰받고 어떤 느낌이셨는지요?

 

장식적인 꽃그림을 그리는 것은 저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불교에 관한 그림이라니 제일먼저 평소에 흠모하던 고려불화를 먼저 떠올리게 되더군요. 고려불화의 그 아름다움 발끝 정도에도 못 미치겠지만, 당시 붓을 들었던 선조들의 맑은 정신세계를 한 번 엿보기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4. 기독교 신자라고 하셨는데, 불교에 관한 책을 부탁받으셨을 때 어떠셨는지요?

 

저는 『성경』에 대해 그저 일반 신도들이 아는 상식적인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줄을 읽어도 저의 마음에 진정으로 와 닿는 것에 몰입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시를 읽을 때처럼 말이지요. 완전한 몰입이 아니라면 시간 낭비지요. 표지작품을 부탁받고 『아함경』 원고 일부를 읽었을 때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가지고 있던 제 자신의 의문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제가 기독교 신자이긴 하지만 조형적인 면에서는 우리의 불교문화유산이 세계 최고의 미학적 수준이라는 것에는 개인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또 어떻게 그러한 조형세계가 가능했을까 하는 질문을 항상 하던 터였어요. 그래서 이 작업은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를 넘어선 한국문화유산에 관한, 전문가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 『아함경』을 읽으며 작업하셨다고 하셨는데요, 인상에 남는 『아함경』의 구절이 있으신지요?

 

책 본문의 편집과정이 마무리 단계인 때이고 시간 관계상 제가 전체를 읽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아함경 제2권-붇다의 생애』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한 줄씩 음미해가며 매일 조금씩 읽어나갔고, 아침과 낮에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교리형식 중에서는 먼저 허공에 대한 비유가 매우 놀라웠습니다.

 

‘저 허공이 물질이 아니고 상대가 없어 볼 수도 없듯’-「잡아함 376 유탐경4」-

‘한량없는 허공의 세계는 물질 때문에 알 수 있나니’-「잡아함 456 정수경」-

 

그리고 전체적으로 상황묘사가 매우 미학적인 데에 감탄했습니다.

일부분 이해가 벽에 부딪히는 일도 있었으나 초등학교 때에 어린이 불교설화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과 겹쳐지면 전체적으로 순조롭게 읽어갔습니다.

 

‘끝내 오고감이 없이 늘 고요함이 둘도 아닌 중도의 자리에서 가심없이 가심’

‘붓다의 그러함은 그렇지 않되 크게 그러함이다. (불연지대연)’

‘아는 자아와 앎 활동인 행위와 알려지는 세계는 서로 의지해 서있다. 세 가지는 모두 있되 실로 있지 않고 없되 실로 없지 않다.’

‘자아. 행위. 세계가 원래 있되 공한 줄 알면 저 번뇌의 불도 곧 없는 것이니’

-「3. 나르바나 드시기 바로 전까지 교화를 멈추지 않으시는 여래」중에서-

 

제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러한 구절이 기독교 『성경』 속에서 제 나름으로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히려 분열과 자책으로 고통받던 어떤 면이 아름답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6. 작품을 하며 유독 힘들었던 점이나 에피소드가 있는지요?

 

먼저 의뢰받은 시점에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원래 출간은 초파일에 맞춰져 있었거든요. 매일 강도 높은 작업 때문에 눈이 침침해졌어요. 작품의 크기가 소품이라 구부리고 작업을 하다 보니 허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은 소품으로 결정했지만 몰입의 강도는 매우 높았습니다.

 

 

7. 책이 나온 지금의 심정은 어떠신지요?

 

작품뿐만 아니라, 표지에 작품을 앉히는 디자인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한길사의 디자이너와 함께 상의하며 진행했습니다. 저의 의견을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8.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떤 이미지로 다가가고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책이라는 것이 글과 의미를 담기도 하지만, 그림과 종이의 촉감 그리고 오브제로서의 아름다움을 포함하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학담평석 아함경』이 이런 측면을 잘 보여주고, 우리 삶에 매우 특이한 문화적 형태로 각인되는 전집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혜련 개인전

313아트프로젝트(강남구 신사동 630-31)
2014년 9월 3일~10월 2일

 

 

 

 

Posted by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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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림

    좋은 글 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
    김혜련 선생님이 "학담 평석 아함경" 표지화를 그리게 된 사연을
    자세히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김혜련 선생님, 그리고 이 글을 써주신
    이지은 편집자님!

    2014.09.12 09:15 [ ADDR : EDIT/ DEL : REPLY ]